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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꽃밭에 물을 주는 정치

형!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어디든 놀러 가고 싶기도 하지만 오늘 저는 놀러 가는 일은 안하기로 했습니다. 가만히 집에서 책도 보고 텔레비전도보고 딸하고 이야기도 하면서 하루를 보낼 생각입니다. 저녁에는 개표방송 을 보면서 소주도 한잔하려고 해요. 오늘은 그냥 차분하게 아니 경건하게집에서 시간을 보낼 거예요. 저는 오늘 같은 날에는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 이 들어요. 그렇다고 놀러 간 사람들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요. 오늘, 투표하는 날이 뭐 그렇게 중요하냐고, 시인이라는 사람이 정치에 뭐 그렇게 관심이 많냐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이 좀 달라요. 시인이야말로 이 시대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하고 어떻게 흘러가야 하는지에 대해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사회적인 고민을 담은 그런 시를 쓰는 건 아니라는 걸 형이 더 잘 알잖아요. 형, 오늘 아침에 저는 아파트 앞 꽃밭에 물을 줬어요. 그동안 날이 너무 메말라 꽃들이 영 생기가 없어 보여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투표일이 공휴일이다 보니 이런 즐거움도 있네요. 30분 넘게 꽃밭에 물을 수북이 뿌리 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었습니다. 뭐 땅이 그리 넓어서 30분씩이나 물을 뿌렸느냐고 비웃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넓지도 않은 아파트 앞 꽃밭에 30분씩이나 물을 뿌린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내가 준 물들은 나무와 꽃들의 뿌리를 적셔 그들을 생기 있게 해주겠지요. 그러나 또 뿌리와 만나지 못한 물들은 땅속으로, 땅속으로 스며들고 말겠지요. 그래서 헛수고를 한 건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아무리 땅속으로 스며들어 나무나 꽃들에게는 소용없는 물이 됐을지라도 그 물들은 땅속에 살고 있는 어떤 생명체, 그 생명체에게는 조금이라도 도 움이 됐겠지요. 저는 꽃밭에 물을 뿌리면서 그런 생각을 한 겁니다. 땅 위에 올라와 있는꽃과 나무들만이 아니라 땅속에 숨어 있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생명체, 그런 생명체도 소중하다는 생각을 한 거지요. 땅 위에 올라와 꽃을 피 우고 열매를 맺으며 우리를 기쁘게 하는 꽃과 나무들만이 행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땅속 어두운 곳에서 살고 있을 그 어떤 생명체들도 삶의 행복 을 느껴야 하는 것 아닐까요. 형, 지난번에 이야기 끝에 정치 이야기가 나오고 결국은 우리는 얼굴을 붉 히고 말았지요. 형과 저는 정치에 관해서는 서로 의견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친한 사람과는 정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 서로의 생각이 같으면 다행이지만 서로 생각이 다르면 결국 얼굴을 붉히 게 되니까요. 그러나 그날 얼굴이 붉어져 못다한 이야기를 이 글을 통해서라도 하고 싶네요. 형, 저는 그냥 살던 대로 사는 삶이 싫어요. 제가 시를 쓰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도 그냥 살던 대로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에요. 제가 살고있는 세계에 만족한다면 시를 쓰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세계, 지 금과는 다른 세계, 그런 세계가 그리워 저는 시를 씁니다. 끊임없이 다름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바라는 세계, 지금과는 달라져야 하는 세계는 이런 세계입니다. 땅속 깊이 숨어 있지만 결국 토양을 비옥하게 하고 꽃을 피워내고 열매를 맺게하는 그런 생명체, 바로 그런 모든 생명체들이 행복해져야 한다는 겁니다. 여태까지의 정치는 그런 행복을 주지 못했잖아요. 우리의 가슴 속 깊은곳은 너무 메말라 있었잖아요. 또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나라 이 땅에서 행복의 ‘행’자조차 입 밖에 꺼낼 수 없었잖아요. 제가 선거일을 경건 하게 보내고 싶은 까닭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새날이 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선거를 통해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지리라 기대하면서도 언제나 우리는 배신을 당해왔지요. 그러나 이제, 오늘 내가 경건한 마음으로 투표를 했던 이 나라의 국회의원들이 메마르고 메마른 이 땅에, 이 나라 국민들의 가슴 속 깊은 곳까지 수북이 물을 뿌려주는 그런 사람들이 됐으면 좋겠어요. 형 ! 오늘 형은 나와는 다른 당을 찍었겠지요. 어떤 때는 ‘왜 저럴까? 왜 저 렇게 뭘 모르는 소리를 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형이 미워질 때도 있었지요. 하지만 형, 나는 형을 좋아하고 사랑해요. <저작권자ⓒ 한국i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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