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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鄭棟柱씨 '논개'서 崔慶會장군 재조명

임진왜란 때 진주성이 쉽게 함락된 것은 병력의 절대 열세보다는 영호남 갈등에 따른 분열과 외면 때문이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작가 鄭棟柱씨는 저서 「논개」(한길사)에서 의병장 출신의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崔慶會를 재평가하지 않고는 진주성 전투의 패인을 알 수 없다면서 論介의 죽음 역시 그를 배제하면 설명이 불가능해진다고 강조했다. 정씨는 전남 화순 출신의 의병장 최경회가 경남 의령 출신의 의병장 곽재우를 제치고 진주성 함락 두달 전에 우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자 영남의 관군과 의병이 그를 철저히 외면해 결과적으로 참담한 패배를 불러왔다고 밝혔다. 최경회가 역사에서 묻힌 이유에 대해 정씨는 "그의 직계후손이 완전히 끊겨 가문 차원의 재조명작업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당시 지식인들조차 의도적으로 그의 활약을 외면했으며 남겨진 기록도 최경회를 배제한채 그의 후실인 논개를 기생으로 둔갑시켜 평가절하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최경회와 논개의 관계를 80년대부터 끈질기게 추적해온 정씨는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지난 1월 내용이 공개된 17세기 문인 민순지의 「임진록」과 18세기 의정부좌참찬 권적의 비변사 상소문, 19세기에 간행된 「호남절의록」 등을 내세웠다. 이들 자료에 따르면 전북 장수 출신인 논개는 장수 현감으로 부임한 최경회를만난 뒤 후실이 됐으며 전투 직전 진주성으로 따라가 남편이 자결한 뒤 왜장을 유인, 함께 목숨을 끊었다. 패전 당시 진주성 인근에는 곽재우를 비롯한 영남의 의병과 관군이 집결해 있었으나 최경회의 지원요청을 모두 묵살했으며 그 결과 3천명으로 추정되는 진주성군은 병력에서 압도적 우위를 보인 왜군에 일망타진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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