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의 백14가 눈길을 끄는 수순이다. 날일자도 눈목자도 아닌 세칸 씌움인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의외로 기략이 풍부한 행마였다. 박영훈은 이 낯선 수를 보고 10분쯤 대책을 생각했다. 검토실의 한철균7단은 흑이 가로 차단하는 수단이 있을 듯하다고 말했는데 박영훈은 일단 15로 힘을 비축하는 길을 택했다. 구리는 평소에 연구가 끝나 있었는지 노타임으로 16에 철썩 갖다붙였다. 박영훈은 다시 10분을 숙고했고 실리의 급소인 흑17로 응수했는데…. 며칠 후 이번 3번기를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온 박영훈은 검토회에서 흑17이 패기 부족이었다고 후회했다. 그의 얘기를 그대로 전하면 다음과 같다. “실리를 탐내는 것은 프로라면 다 똑같지만 지금은 좀더 입체적인 작전을 생각할 찬스였다. 흑17은 부분적으로는 훌륭한 수순이지만 상대를 편안하게 해준 악수나 다름없다.” 흑17로는 참고도1의 흑1로 올라서서 3으로 끊는 것이 유력했다. 흑5로 힘차게 뻗어두면 분단된 백은 수습에 골머리를 앓아야 한다. 물론 백이 잡히지는 않는다. 백10으로 이단젖히는 맥점이 있다. 그러나 흑은 우하귀의 실리를 차지하고 백을 연결시켜 주면 된다. 백은 연결만 되었다는 것뿐이지 아직도 안형이 전혀 없는 곤마의 신세. 만약 백이 참고도2의 백8로 버티고 12로 치중하는 맥점을 구사해 오면 어떻게 되는가. 그때는 귀의 2점을 버리고 중원의 주도권을 휘어잡아 역시 흑의 만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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