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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숙명의 라이벌이자 동지 '양김' 역사속으로

신민당 시절부터 대선까지 경쟁

고개돌린 김영삼과 김대중
지난 1987년 10월 고려대에서 열린 '거국중립내각쟁취실천대회'에서 야권 후보 단일화를 앞두고 굳은 표정으로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김대중(DJ) 전 대통령에 이어 22일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한국 현대사의 큰 획을 그었던 '양김 시대'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YS와 DJ의 경쟁이 곧 현대사"라는 말처럼 이 둘은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를 쟁취했던 동지이자 대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 영원한 맞수로 정치사를 장식했다.

정치 입문은 YS가 빨랐다. YS는 지난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27세의 나이로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 기록을 세우며 정계에 데뷔했고 DJ는 1961년 5대 민의원으로 정치권에 공식 입문했다.

1968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은 '양김'의 첫 번째 대결이었다. 신민당 당수였던 유진오 총재가 DJ를 원내총무로 지명하자 이미 세 번의 원내총무를 지낸 바 있는 YS가 DJ를 낙마시킨 것이다. 하지만 19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타이틀을 DJ가 YS를 누르고 거머쥐면서 YS 쪽으로 기울어졌던 양김의 라이벌 구도는 다시 치열하게 진행된다.

군사정부 시절이 장기화되면서 이 둘은 '휴전'을 선언하며 민주화의 길을 함께 걸었다. 1985년 DJ의 동교동계와 YS의 상도동계가 두 사람을 공동의장으로 해 결성한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하고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주도하며 민주화를 쟁취해냈다.



대통령직선제를 이끌어낸 DJ와 YS는 1987년 대선 야권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며 장기간 갈라서게 된다. 두 사람의 권력욕이 노태우 군사정부의 연장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됐고 둘은 반목을 거듭했다.

대권의 자리는 YS가 먼저 올랐다. YS는 집권당이던 민자당의 대표최고위원을 거쳐 대선후보로 선출됐고 1992년 대선에서 DJ와 숙명의 대결을 벌여 먼저 대권을 거머쥐었다. 대선에서 YS에 패한 DJ는 정계은퇴를 선언한 뒤 영국으로 떠났다가 귀국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고 1997년 대선에서 4수 끝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DJ 집권 후 문민정부 비리청산 작업이 본격화되면서 YS의 아들 김현철씨 등 YS 측근들이 법적 심판대에 올랐고 양김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YS와 DJ의 화해는 DJ가 서거하면서 이뤄지게 됐다. YS는 2009년 8월 병마로 입원해 죽음을 앞둔 DJ를 전격 방문하고 화해를 선언함으로써 양김의 역사는 '종전'으로 마무리됐다. /박형윤기자 manis@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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