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부터 몇몇 기업 오너가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났다.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이들이 별다른 이유 없이 줄줄이 등기이사직을 내놓은 이유에 대해 연봉 공개에 대한 부담 때문이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연간 5억원 이상 보수를 받는 등기이사는 연봉을 사업보고서에 기재하도록 자본시장법이 개정됐기 때문이다.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난 오너들은 경영 투명성과 책임 경영을 외면한다는 비판에 침묵만 지켰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행보에 눈길이 가는 것은 이 같은 상황 때문이다. 최 회장은 '대세(?)'를 거스르며 등기이사직에 복귀하는 길을 택했다.
그가 이미 연봉 공개로 한 차례 홍역을 앓은 점을 감안하면 더욱 이례적인 결정이다. 최 회장은 지난 2013년 수감 중인데도 등기이사직을 맡고 있던 계열사로부터 연봉을 받아 따가운 눈총에 시달렸다. 문제가 제기되자 세금을 제외한 연봉 전액을 기부했지만 그로서는 떠올리기 싫은 기억일 것이다.
그런 그가 주요 계열사의 등기이사직에 재차 이름을 올리려는 이유는 하나다. "연봉 공개에 대한 부담을 각오하고서라도 책임 경영을 실현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이 SK 관계자의 설명이다. 기업의 미래를 쥔 오너가 등기이사로서 경영에 대한 법적 책임도 지겠다는 것이다.
이를 행위를 이미지를 바꾸기 위한 이벤트로 보는 시각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석방 이후 최 회장의 발언을 반추해보면 진정성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최 회장은 10월 제주도에서 그룹 최고경영자(CEO)들과 가진 세미나에서 "기업의 경영활동은 국가와 사회라는 기반 위에서 이뤄진다. 기업의 성과창출을 위해서라도 사회와 국가의 미래를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경영인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챙기는 목적이 여론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가 아닌, 더 나은 기업활동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런 줄기에서 볼 때 등기이사직 복귀 역시 자신의 경영 철학을 바탕에 두고 결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더 투명하고 도덕적인 기업이어야 지속 가능한 기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등기이사직 복귀만으로 최 회장의 책임 경영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경영 성과를 내고 사회 공헌도 강화해야 한다. 하지만 책임 경영에 대한 의지가 SK그룹 내부뿐만 아니라 다른 기업들에도 한번쯤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산업부=유주희기자 ginger@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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