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대규모 적자를 기록한 조선업에 대한 금융회사들의 불신이 커지면서 상대적으로 영업이나 재정여건이 좋은 조선사들까지 자금 흐름이 막혀 쩔쩔매는 상황이 잇따르고 있다. 조선사에 막대한 돈을 떼인 금융권으로서는 어쩔 수 없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러나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식으로 옥석 가릴 것 없이 조선업에 대한 지원을 회피할 경우 정상 기업까지 수렁에 빠져 국가 산업 기반이 망가지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한진중공업은 일시적인 운영자금 부족으로 7일 채권단 공동관리(자율협약)를 신청했다. 업황 악화와 부동산 등 자산 매각 작업이 지연되면서 2,000억원가량의 자금 공백이 생겼고 채권단에 구조요청을 했다.
한진중공업이 자율협약까지 이른 데는 경영·재무 관리를 못한 탓이 크겠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금융이 제 기능에 소홀한 면도 있다.
한진중공업의 부채는 지난해 11월 기준 약 1조6,000억원이다.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이 5,000억원, 하나은행 2,100억원, 우리은행 1,500억원 등이다. 반면 처분할 수 있는 자산은 동서울터미널과 인천 북항 배후부지 등 2조원대에 달해 부채 규모를 웃돌고 지난해 3·4분기에는 565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 흑자전환에 성공해 실적도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각각 특수선·대형선으로 특화한 부산 영도조선소와 필리핀 수빅조선소는 조선업 불황에도 꾸준한 수주실적을 올려 미래 수익도 확보했다. 이처럼 한진중공업이 영업이나 실적·재무 등 여러 면에서 양호함에도 금융권에서 2,000억원을 구하지 못해 자율협약에 이르렀다.
금융회사들이 한진중공업에 등을 돌린 것은 지난해 주요 조선사들의 대규모 적자 때문이다. 대우조선해양 등 대형 조선사의 깜짝 적자로 금융권은 조선업종에 보다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고 평소 만기가 연장될 채권들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결국 산업은행 홀로 한진중공업을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자율협약으로 상황이 악화했다.
채권단 전원이 동의해 자율협약이 개시되면 한진중공업은 대출 상환 기간을 연장하거나 추가 자금을 받는 식으로 유동성 위기를 넘길 수 있다.
한진중공업은 물론 채권단도 이번 잠깐의 위기만 버티면 경영이 정상화할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조금만 속을 더 들여다보면 조선업 전반에 대한 우려감에 일부 금융사들이 상대적으로 양호한 한진중공업일지라도 '빠져나가고 싶은(여신 회수)' 욕구가 생기고 이것이 한진중공업마저 버티지 못하게 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조선업계의 한 관계자는 "금융권이 보다 적극적으로 대출 연장을 도왔더라면 큰 문제 없이 넘어갔을 일이 커졌다"며 아쉬워했다.
지난해 말 선수금환급보증(RG) 지원을 받지 못해 유조선 8척의 수주 기회를 놓친 SPP조선도 금융이 제 역할을 못한 사례로 꼽힌다. SPP조선은 고강도 구조조정을 통해 지난해 1·4~3·4분기 연속 흑자를 기록해 채권단 관리를 받는 조선사 중 눈에 띄는 성과를 냈다. 그러나 지난 2014년 5월을 마지막으로 추가 수주가 없어 가동 중단 위기에 놓였고 18개월 만에 수주기회를 얻었지만 채권은행들이 RG 발급을 거부했다.
최근 시중은행 사이에서는 구조조정 기업 채권단에서 발을 빼려는 움직임이 뚜렷하다. 특히 우리은행이 민영화를 앞두고 부실채권비율을 낮추려 성동조선해양과 STX조선해양에서 빠져나오자 눈치만 보던 다른 은행들도 동요하는 모양새다.
조선업계의 한 관계자는 "은행들이 제 살길에 급급해 옥석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돈줄을 죄고 있다"며 "금융이 제 역할을 못 하면 산업 기반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임진혁기자 liberal@sed.co.kr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