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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다.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류에 성인이 존재하고 종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불교는 소승불교에 반발해 대승불교가 발전했다. 이전 소승불교가 자신만의 해탈을 추구했다면 대승불교는 보살이라 지칭하는 수행자가 자신을 포함해 모든 중생이 함께 해탈해야 한다는 구제사상이다. 일반 사회원리에서도 나만의 행복이 아닌 공동 이익을 추구하라고 한다. 그런데 '나'만 행복하면 되는데 왜 남의 행복을 염두에 두라고 하는 걸까. 지난해 티베트 승려인 사캬 티진이 한국에 방문했는데 기자회견 중에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세상에 온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스스로도 행복해지고 남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다. 그것을 알아야만 삶의 의미가 생긴다."
남의 행복과 더불어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음이요, 남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한다면 곧 불행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개강하는 날 학생들에게 꼭 이런 말을 한다. "이 수업에서 공부를 하든 안 하든 자유다. 다만 다른 수강생들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 인간의 윤리기준은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쳤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이 글을 읽는 독자께서는 '남을 배려한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필자는 사람만이 아닌 모든 생명 있는 존재를 염두에 두고 이 글을 쓰고 있다. 며칠 전 뉴스에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사람이 개를 매달은 채 몇 ㎞를 달린 내용이 방영됐다. 뉴스 장면에서는 개가 피를 흘리면서 끌려가는 장면이 그대로 보도됐다. 또 어느 부부가 부부 싸움을 하는 와중에 화가 난 남편이 애완견을 아파트 5층 창밖으로 던졌다.
스페인에서는 투우라는 옛 전통문화가 있다. 경기 장면을 TV로 봤는데 경기가 시작되기 전 소를 24시간 정도 어두운 곳에 가뒀다가 경기장에 내보낸다. 선수가 단순히 소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칼로 소를 찌르고 결국 급소를 찔러 죽게 만든다. 경기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즐거워한다. 인간과 똑같이 고귀한 생명을 가진 존재(소)가 피를 흘리며 고통스럽게 죽어가는데 관객들은 환호성을 내지른다. 참으로 인간의 죄업이 무겁다. 그러고도 천국에 가고 극락세계에 가려고 기를 쓰고 있는 어리석은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불교에서 승려들이 활동하지 않고 한 공간에서 수행하는 제도를 안거(安居)라고 한다. 안거가 만들어진 데는 원인이 많지만 그중 하나가 불살생(不殺生) 계율이다. 여름 우기 기간에 비가 많이 내려 날씨가 습하면 자연히 벌레가 많이 생긴다. 이때 스님들이 탁발을 다니다 보면 뜻하지 않게 벌레를 밟아 죽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이 기간은 한곳에 정주해서 수행한다. 또 옛날 스님들은 길을 걸을 때 지팡이에 방울을 달아 소리가 나게 했다. 그 소리를 듣고 땅에 기어 다니는 작은 생명체들이 밟혀 죽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 글을 쓴 목적은 승려의 계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이들도 인간과 똑같이 고통받지 않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인간만이 아닌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 의식이 필요하다고 본다. 고대 이집트 속담에 이런 내용이 있다. 사람이 죽어서 영혼이 하늘에 올라가면 신이 두 가지 질문을 한다고 한다. 하나는 '인생에서 기쁨을 찾았는가?' 두 번째는 '당신의 인생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줬는가?'이다. 이 두 대답에 따라 천국으로 갈지 지옥으로 갈지 결정된다고 한다.
그대는 어디로 갈 거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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