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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쿠데타 미수 사건 - 워싱턴은 왜 국부로 추앙받는가





미국 건국(1776년) 240주년, 대륙군(Continental Army·미군의 전신) 창설로부터는 241년 동안 이어지는 기록이 하나 있다. 무(無) 군사정변. 미국 정부나 미군, 정보기관이 외국에서 쿠데타(coup d’Etat)를 사주한 적은 있어도 본토에서는 한 차례도 없었다.

다만 시도는 없지 않았다. 크게 세 차례. 독립전쟁 막바지인 1783년, 남북전쟁 직후인 1866년 북군 청년 장교들의 모의,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사상을 의심한 군 장성들의 1934년 쿠데타 기도 등의 고비를 미국은 넘겼다. 공통점은 하나같이 돈과 관련 있었다는 점. 대륙군의 엘리트 장교들이 주동이 된 1783년의 ‘뉴버그 음모(Newburgh Conspiracy)’는 더욱 그랬다.

최초의 쿠데타 시도인 뉴버그 음모의 실패는 민주주의 전통의 확립과 더불어 잘 보이지 않는 두 가지 흔적을 남겼다. 첫째, 미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지 않는 모범으로 작용했다는 점. 둘째로는 ‘국부 워싱턴’이라는 빛나는 유산을 얻었다. 최고사령관 워싱턴 장군이 군의 정당한 불만을 슬기롭게 제어한 덕분에 미국의 민주주의가 안착하고 ‘문민 통제의 우위’가 확고하게 뿌리내렸다.

타임머신을 타고 233년 전인 1783년으로 되돌아 가보자. 대륙군 사령부가 위치한 뉴버그(Newburgh·오늘날 뉴욕주 오렌지 카운티 뉴버그시)가 부글부글 들끓었다. 세계 최강 영국과 독립전쟁을 벌인지 8년째. 평화와 봄이 목전에 왔건만 군인들의 마음은 평화도 봄도 아니었다. 앞길이 막막했던 탓이다.

봉급은커녕 약속했던 연금마저 불투명한 터에 종전으로 군의 해체를 앞뒀던 상황. 불만과 위기감이 급속도로 퍼졌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젊은 시절을 굶주리고 헐벗은 채 전쟁터에서 보냈다는 말인가.’ 불만은 시간이 흐를수록 무력을 갖고 있을 때 행사하자는 방향으로 모여졌다. 쿠데타!

대륙군의 불만은 당위성이 있었다. 영국군과 독일용병 8,081명을 포로로 잡고 대포 244문과 소총 수만정을 노획하는 대승을 거둔 1781년 10월 요크타운 전투 이후 전황은 사실상 소강 상태. 한때 104개 대대에 달했던 대륙군 병력도 차츰 줄어들고 간헐적인 소규모 전투만 벌어지는 가운데 대륙군에 돈이 떨어졌다.

물론 자금난은 어제 오늘의 상황이 아니었다. 독립 13개주의 연합체인 대륙회의가 중앙정부처럼 존재했어도 요즘의 국제연합(UN)같이 징세 권한은 없던 터. 대륙회의가 1775년 특별 발행한 불태환지폐인 ‘컨티넨탈’은 1780년에는 액면가치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컨티넨탈 지폐를 봉급으로 받은 군인들의 삶은 더욱 곤궁해졌다.

‘쓸모 없다’는 뜻의 숙어 ‘As worthless as a Continental’(컨티넨탈 지폐처럼 가치 없는)이 생기는 마당에 대륙회의는 1780년 8월, 군인들의 불만을 무마하려 따른 카드를 꺼냈다. ‘당장은 돈을 못 주는 대신 전쟁이 끝나면 군이 해체돼 제대하더라도 평생토록 봉급의 절반씩을 연금으로 주겠다.’

군인들은 워싱턴 사령관의 종용으로 대륙회의가 마련한 ‘평생 절반연금(half pay for life)’ 약속을 믿었지만 신뢰는 갈수록 얇아갔다. 13개주가 돈을 갹출하지 않아 대륙회의라고 방법이 없었다. 워싱턴 장군의 부관 출신인 알렉산더 해밀턴 등이 주도해 대륙회의가 관세를 걷어 군인들의 봉급을 충당하자는 방안도 12개 주가 찬성한 가운데 가장 작은 주인 로드아일랜드가 반대해 무산돼 버렸다.

애가 탄 장교들은 사령관인 워싱턴 장군에게 매달렸다. 워싱턴의 부관 출신인 루이스 니콜라 대령은 사령관에게 ‘왕관 편지(Crown Letter)’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될 편지를 보냈다.

“온갖 어려움을 겪어온 군인들의 인내는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군은 대륙회의가 군인들의 불만을 해소하지 않고 이전의 연금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전쟁이 끝나도 군을 해산하지 않을 것입니다. 동료 장교들은 ‘새로운 차원의 피와 혼란의 상태가 불가피하다’고 공공연히 말합니다. 저는 공화정이 좋지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모습에 실망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지금 이 나라에는 공화국의 지혜보다 군주국의 에너지가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총사령관님께서 미국 최초의 군주가 되어주기를 간청합니다.”*

요컨데 ‘군의 쿠데타를 통해 왕으로 등극하라’는 요청을 워싱턴은 점잖은 어조로 물리치면서도 속으로 적잖게 놀랐다. 군의 불만을 익히 알고 있어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했었으나 엘리트 장교들까지 행동에 나서기 직전이라는 분위기는 몰랐기 때문이다. 니콜라 대령은 워싱턴 장군에게 세 차례 편지를 보내며 사죄했건만 정작 한번 표출된 장교단의 분통 터진 마음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워싱턴 장군은 너무 온건해 쿠데타를 도모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장교들이 쿠데타의 상징으로 내세운 인물은 호레이쇼 로이드 게이츠(Horatio Lloyd Gates) 장군으로 대륙군이 거둔 최초의 의미 있는 전투인 사라토가 전투(1777년 9월)의 영웅. 대패를 기록한 캠던 전투(1780년 8월)에서는 비겁하게 패주했다는 비판에 시달렸던 그는 대륙회의 청문회에 섰으나 무혐의 판결을 받고 쉬다가 워싱턴의 지목에 의해 대륙군 부사령관으로 임명됐던 인물이다.

게이츠 장군은 남다른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럴 만 했다. 군사적 경험이 많지 않은 민병대 출신의 대륙군 지휘부와 달리 그는 영국 정규군 경험을 갖고 있었다. 어머니가 영국 귀족의 가정부였던 연줄로 1745년 육군 중위로 입대한 이래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48)과 7년 전쟁(1756~1763)에 참전, 유럽과 캐나다 전역에서 전쟁을 치른 영국군 소령 출신. 나이도 워싱턴보다 6살 많았다.

케이츠 장군을 축으로 하는 장교단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1782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고위 장교 3명을 대륙회의에 보내 ‘대륙회의가 관세안을 통과시켜 봉급과 연금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었는데 이젠 방법이 없다. 뉴버그에서 화약통이 폭발할 것’이라는 으름장을 놓았다.

상황은 도리어 더 나빠졌다. 대륙회의의 재정을 맡아 개인 신용으로 800만 달러를 짜냈던 로버트 모리스가 ‘더 이상 돈이 없다’며 두 손 들고 관세안을 비준했던 버지니아주와 뉴잉글랜드도 반대로 돌아서 연금을 받게 될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졌다. 평생 연금이 아닌 적절한 액수의 총액으로 수령하자는 대체안도 대륙회의에서 무산되고, 종전을 위한 강화회담이 열리던 프랑스 파리에서 타결 소식을 속속 들어오니 군인들의 머리는 ‘빈털터리로 군복을 벗는다’는 위기감으로 꽉 찼다.

워싱턴의 부관 출신으로 미리 제대해 대륙회의 의원으로 일하며 훗날 초대 재무장관으로 명성을 날린 알렉산더 해밀턴도 워싱턴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무런 대책이 없이 평화가 온다면 군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할 수도 있고, 군대는 사령관님의 온건한 성향에 불만이 많다.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 달라’는 내용이었다.



위기가 짙어지고 대륙회의의 강경파 의원들은 대륙군의 쿠데타를 저지할 또 다른 군대의 소집을 준비하는 가운데 장교단이 익명의 성명서를 냈다. ‘우리에게 더 많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사람을 의심하자.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선포돼 군대가 해산된다면 우리는 불응할 것이다. 우리는 뛰어난 리더의 지휘 아래 원하는 세상을 얻을 수 있다!’는 골자의 성명서는 장병들을 뒤흔들었다.

워싱턴 장군은 문제의 성명서를 명문이라고 평가하면서도 명령을 내렸다. ‘성명서에 적시된 화요일의 장교단 집회를 불허한다. 대신 토요일 집회를 허가하되, 본관은 참석하지 않는다. 사회는 게이츠 장군이 맡는다.’ 쿠데타 세력은 또 다시 성명서를 퍼트렸다. ‘마침내 워싱턴 사령관도 거사에 찬성하고 동참한다는 뜻을 밝혔다’라는 내용이 새로 들어갔다.

워싱턴은 과연 동조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회합을 나흘 뒤로 미룬 이유는 장교단의 분노를 한 숨 가라 앉히려는 전술이 숨어 있었다. 집회일이었던 1783년 3월 15일 회의에도 ‘게이츠 장군이 사회를 보라’고 했던 명령과 달리 워싱턴 자신이 직접 나타났다. 뉴버그 사령부의 회의장소로 쓰였던 ‘템플(temple)’이라는 건물(252㎡·약 76평)에 모인 장교들이 긴장한 순간, 워싱턴은 입을 뗐다.

“나는 여러분의 헌신과 희생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명서는 이성과 선의보다는 감정과 울화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군과 시민을 분리시키는 게 옳다는 말인가요? 그 선동가의 말이 맞다면 우리는 자유를 잃고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될 것입니다. 대륙회의는 늦더라도 결국 정당하게 일을 처리해줄 것이라 믿습니다. 성장하는 이 나라를 내란에 빠트리지 맙시다.”

워싱턴의 연설에도 장교들은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되레 회의장에 불만의 기운이 감돌고 누군가 ‘사령관을 체포하라’고 선동한다면 먹혀 들어갈 분위기 속에서 워싱턴은 주머니에서 편지 하나를 꺼냈다. 군대의 불만을 해결하겠다는 내용이 적힌 대륙회의의 한 의원이 보낸 편지였다. 편지와 함께 워싱턴은 안경을 끼며 미안한 심정으로 양해를 구했다.

“여러분! 내가 안경 쓰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조국을 위해 싸우는 동안 머리는 백발이 되고 눈은 장님이 될 정도로 침침해졌습니다.”

솔직하고 꾸밈없는 워싱턴의 말 한마디는 장교단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말보다 장면이 먹혀들었다. 총사령관이 안경을 쓴 모습을 처음 본 장교들은 속으로 흐느꼈다. 편지 낭독을 마친 사령관은 모든 것을 장교단의 뜻에 맡긴다며 회의장을 떠났다. 장교들은 결국 쿠데타 계획을 접었다. 군대가 쿠데타 계획을 포기했다는 소식을 들은 대륙회의는 군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려던 계획을 백지로 돌렸다. 훗날 미국의 4대 대통령에 오른 제임스 메디슨은 이날의 사건을 ‘하늘 가득 모였던 전쟁의 먹구름이 가셨다’고 일기에 썼다.

며칠 뒤 대륙회의는 장교단에 제안 하나를 내놓았다. 대체안을 실행하되 앞으로 구성될 연방 정부가 지급 능력을 갖출 때 상환하는 유가증권으로 5년간 지불을 유예한다는 내용이었다. 군은 이를 받아들였다. 만약에 워싱턴이 왕이 되려고 했거나 쿠데타를 방조했다면 역사를 어떻게 흘렀을까. 미국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작가인 스티븐 엠브로스가 지은 ‘만약에’의 한 토막. ‘만약에 조지 워싱턴이 뉴버그의 음모를 저지하지 못했다면?’편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워싱턴이 군대의 마음으로 돌려 놓는데 실패했다면 독립전쟁은 복잡하게 얽힐 수도 있었다. 군은 의회로 진군해 총 뿌리를 겨누고 계약조건을 강요했을 것이다. 주(州)들은, 특히 버지니아와 메사추세츠 같이 큰 주들은 그런 강압적 거래의 승인을 거부했을 것이다. 군대가 복종을 강요하라고 시도했다면 내란이 발발했을 것이다. 불안정한 아메리카 연방은 붕괴되고 뉴욕에 함대와 지상군을 주둔시켰던 영국군은 당연히 전쟁을 재개하려고 했을 것이다. 어떤 주는 영국 편으로 되돌아가고, 뉴저지와 뉴욕같이 영국을 강력히 지지하는 몇몇 주들은 무법의 대륙군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영국군과 방어동맹을 맺을 것이다. 이런 위기는 결국 아메리카의 독립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총사령관 워싱턴은 1783년 11월 말께 영국군이 뉴욕에서 물러난 뒤 12월 고별 연설과 함께 대륙회의에 칼을 반납하고 민간인으로 돌아갔다. 군권을 쥐고 있던 워싱턴이 민간 정부에 모든 것을 돌려준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영국 국왕 조지 3세는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미 합중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된 뒤에도 워싱턴은 3연임을 바라는 청원들을 민주주의의 장래에 해가 될 수 있다며 물리쳤다. 국가의 비밀을 지키려 자서전 집필도 마다한 채 죽을 때까지 그는 농부로 살았다. 토마스 제퍼슨(초대 국무장관, 3대 대통령)은 이런 말을 남겼다. “단 한 사람의 자제와 덕성이 대부분의 다른 혁명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려는 자유를 파괴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과 달리 우리의 혁명이 그렇게 막을 내리는 것을 막았다.” 워싱턴 한 사람으로 인해 신생 국가 미국은 쿠데타와 왕정 국가 수립을 피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미군 쿠데타 미수 사건을 뒤지며 233년의 시차를 넘어 이 땅을 생각한다. 대비된다. 집권을 위해 민족에 반역한 친일파를 중용하고, 영구집권을 노려 전쟁의 와중에서도 국회를 군경으로 포위한 채 수학의 일반원칙까지 뛰어넘는 해괴한 산식(사사오입)으로 헌법을 뜯어고쳤던 어느 초대 대통령과. 쿠데타로 점철된 이 땅의 역사는 또 어떤가. 미국인들이 워싱턴을 국부(國父)로 존경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부럽다. 참 부럽다.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 편지 내용은 한국서양문화사학회 발간 서양사학연구 제 36집(2015년 9월) ‘독립전쟁기 뉴버그 쿠데타 음모 미수 사건과 조지 워싱턴(The Newburgh Coup Conspiracy in the American Revolution War and George Washington)’에서 발췌했다. 편지 외에도 워싱턴 장군의 3월 15일 연설 내용을 비롯해 나의 조사 능력을 벗어나는 많은 부분을 참고했음을 밝힌다. 건양대학교 기초교양교육대학 김형곤 교수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 군인들에게 약속했던 연금은 제대로 지켜졌을까. 그렇지 않다. 1786년 8월 말께 매사추세츠 펠헴 마을에서 발생한 셰이즈의 반란(Shays‘ Rebellion)은 연금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독립전쟁 영웅이었으나 봉급은 물론 참전수당을 받지 못해 빈농으로 전락한 퇴역 대위 대니얼 셰일즈는 매사추세츠 주정부가 가구당 20파운드(요즘 가치 약 300만원)의 인두세를 부과하자 봉기를 이끌었다. 반란군은 순식간에 1,800명으로 불어났는데 셰이즈와 같은 처지의 퇴역군인이 많았던 탓이다. 반란군 일부는 경제난 탈출을 위해 영국의 지배로 돌아가자는 주장까지 앞세웠다.

농민반란군은 이듬해 2월 상인들의 자금으로 조직된 4,400여명의 진압군이 쏜 대포 두 방에 9명의 사망자를 낸 채 산산이 흩어졌지만 소기의 성과를 이뤘다. 주마다 반란의 파급을 막기 위해 세금 경감, 채무 변제 등의 후속 조치를 내놓았다. 사형선고를 받았던 주모자들도 사면을 받았다. 반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반성은 미국 헌법 제정(1787년)과 연방정부 탄생(1789년)으로 이어졌다.

셰이스 반란이 신생국가의 성격을 13개 독립주의 느슨한 동맹체에서 연방국가로 탈바꿈시킨 셈이다. 반란이 자양분 역할을 했기 때문일까. 토머스 제퍼슨은 당시 이런 말을 남겼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때때로 애국자와 압제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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