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입학 무렵, 덩치가 크고 힘이 좀 센 편이었습니다.
그 무렵 사내 녀석들은 항상 치고 패고 싸웠습니다.
갓 초등학교를 졸업한 꼬마들 싸움이었지만, 결과에 따라 아이들이 대하는 태도가 달랐습니다.
그래서 승률이 오르면 서열이 오르고, 이내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습니다.
4월 어느 점심시간, 시비가 붙었습니다.
싸우는 우리 반 친구들을 말리는데, 다른 반에서 구경 온 어떤 녀석이 내 뺨을 때린 겁니다.
옆 학교에서 날렸던 녀석인 건 알았지만, 싸움에 제법 자신이 붙었던 때라 해볼 만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른쪽 광대뼈 딱 한대를 가격 당하고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눈앞이 새까매져 일시적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난생 처음 겪는 현상에 아픔보다 놀라움이 컸습니다.
순식간에 전의가 메말라 버렸습니다.
구타의 종류와 잔혹성이 중학생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녀석의 살기에 아무도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억수같이 비가 퍼붓던 날, 교실엔 퍽퍽 두들겨 맞는 소리와 먼지가 자욱했습니다.
나중에 듣고 보니, 무시무시한 녀석이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싸울 때 벽돌을 사용했다더군요.
놈은 우리 학년의 실질적 주먹대장이었습니다.
좀 논다던 2~3학년 선배들조차 두려워할 정도였습니다.
이듬해 녀석과 같은 반이 됐습니다. 생각지 않게 그럭저럭 친해졌습니다.
머리가 좋았고 의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항상 가난과 폭력에 시달려 막막하게 살아갔습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삥을 뜯었고, 하교 후에는 폭력조직 선배들에게 불려다녔습니다.
그 무렵 이사한 집이 가까워, 녀석은 종종 늦은 저녁에 우리 집에 놀러 오곤 했습니다.
라디오 하나 벗하고 살던 시절이라, 나는 그런 녀석을 반겼습니다.
찬밥에 반찬 몇 가지를 내오면, 녀석은 허겁지겁 먹었습니다.
이런저런 시덥잖은 얘기들을 나누다가 일어설 때면, 녀석은 말하곤 했습니다.
“넌 꼭 공부로 성공해라.”
난 피식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아버지가 공고 가라신다. 나까지 대학 보낼 형편 안 된다고.”
녀석은 아무 말 없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날 바라봤습니다.
그런 녀석의 주머니에, 슬그머니 사과를 하나 넣어주곤 했습니다.
“사과는 내가 해야 되는데, 맨날 받기만 한다. 나중에 이 사과 저 사과 다 줄게.”
그럴 때면 이 자식이 정말 나한테 미안해하는 건가 궁금해지곤 했습니다.
몇 달 후, 녀석은 집을 나가고 학교를 그만뒀습니다.
아무 말 없이 떠난 녀석의 사연이 궁금했지만, 아쉽지는 않았습니다.
녀석에게 당했던 굴욕적 폭행의 트라우마가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교 시절, 다른 동창들로부터 녀석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녀석은 서울 인근의 고깃집에서 종업원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종종 가출한 아이들이 찾아가면, 밥을 먹이고 차비도 줬다고 합니다.
녀석의 미래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단지 그게 다였습니다.
이후 대학에 진학하고 군대에 갈 때까지 나는 녀석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군대에서 해방된 1997년 12월 4일, 친구들과의 술자리에 녀석이 찾아왔습니다.
7년 만이라 반가운 마음에, 이 얘기, 저 얘기 건넸는데, 분위기가 좀 이상했습니다.
다른 친구들 얘기로는 스무 살 무렵 객지에서 만난 여성과 살림을 차렸는데, 그녀가 녀석을 버리고 떠났다더군요.
괴로움에 술에 젖어 살았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술에 찌들다 보니, 얼굴이 나이보다 늙수그레하고 정신도 온전치 않아 보였습니다.
게다가 중학교 중퇴의 학력이 발목을 잡아, 변변한 일자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술에 기대는 날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IMF 조약이 체결된 이튿날 저녁이었습니다.
복학 후 꽤 오랜 시간 동안, 학업과 아르바이트로 치열한 날들을 보냈습니다.
시골 소식에 귀 기울일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학교를 마치고, 직업을 찾았습니다.
남들처럼 가정을 꾸리고, 나름 가정과 직장에서 안정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훌쩍 마흔을 바라보는 무렵이 이르렀습니다.
여유가 생기니 잊고 지냈던 사람들이 궁금해지더군요.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녀석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너무 오래 술에 찌들어 간이 심하게 상했답니다.
병원에 갔을 때엔 이미 손을 쓸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중학교를 그만두고 달아난 이유도 들었습니다.
녀석이 속해있던 폭력조직이 무언가를 지시했는데, 그로 인해 인생을 망치고 싶지 않아 택한 게 결국 도망이었습니다.
아주 잠시 동안 많은 기억들이 스쳐 갔습니다.
참 고단한 삶을 살았더군요.
빈곤과 폭력으로 얼룩진 인생.
어느 순간 스스로의 삶을 선택할 수 없게 됐고, 이후 겪은 건 절망과 무기력함뿐이었습니다.
종래엔 흐릿한 정신으로 지독한 외로움 속에 시들어간 녀석이 가여웠습니다.
이상하게도, 소년 시절 마음의 상처였던 폭행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지나온 나의 시간이 파란만장했다고 느꼈는데, 오히려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어도 내겐 제대로 살 수 있는 선택의 기회는 있었으니까요.
친구의 불우한 죽음에 대한 씁쓸함과 내 삶에 대한 얄팍한 안도감이 뒤섞인, 이상한 순간이었습니다.
분명한 건 지금의 시간이,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날들이 아주 소중한 선물이라는 것 같습니다.
녀석이 갚겠다던 사과는 그걸로 충분히 받은 것 같습니다.
/식담객 analogoldman@naver.com
식담객 신씨는?
학창시절 개그맨과 작가를 준비하다가 우연치 않게 언론 홍보에 입문, 발칙한 상상과 대담한 도전으로 주목을 끌고 있다. 어원 풀이와 스토리텔링을 통한 기업 알리기에 능통한 15년차 기업홍보 전문가. 한겨레신문에서 직장인 컬럼을 연재했고, 한국경제 ‘金과장 李대리’의 기획에 참여한 바 있다. 현재 PR 전문 매거진 ‘The PR’에서 홍보카툰 ‘ 미스터 홍키호테’의 스토리를 집필 중이며, PR 관련 강연과 기고도 진행 중이다. 저서로는 홍보 바닥에서 매운 맛을 본 이들의 이야기 ‘홍보의 辛(초록물고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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