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미국 가전업체 월풀은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중국에서 생산해 미국으로 판매하는 세탁기에 반덤핑 관세를 부과할 것을 자국 상무부와 국제무역위원회에 요구했다. 중국 언론보도에 따르면 월풀이 주장한 덤핑마진율은 무려 69.92~109.04%에 달했다. 앞서 한국타이어와 금호타이어 등 국내 타이어업체가 중국법인에서 생산한 일부 제품도 미국과 유럽연합(EU)에 의해 덤핑분쟁에 휘말렸다.
최근에는 더욱이 세계 경제패권을 놓고 다투는 주요2개국(G2), 즉 미국과 중국의 통상마찰에 한국이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듯’ 애꿎은 피해를 입고 있다는 푸념이 기업들 곳곳에서 쏟아져나오고 있다.
글로벌 경제의 저성장 기조가 고착화되면서 국가 간 무역에서 탈출구를 모색하려는 각국의 전략으로 글로벌 통상전쟁이 더욱 격화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 업체들은 미국 현지에 생산기지를 지어 통상마찰에 따른 위험을 줄이는 전략을 펴고 있지만 각국의 보호무역 수위가 워낙 빠르게 높아지면서 뾰족한 대응방안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G2’ 통상전쟁에 불똥 맞은 한국 철강=글로벌 통상마찰이 가장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는 분야는 철강·금속이다. 공급과잉이 가장 극심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과잉생산된 중국산 저가 철강제품이 세계무역질서를 어지럽힌다며 반덤핑 관세를 부과하면서 생산 감축을 요구했고 여기에 EU까지 가세했다.
미국과 중국의 통상마찰 수위가 갈수록 높아지면서 당장 국내 철강산업에 불똥이 튀었다. 미국 정부는 지난달 중국산 냉연강판에 대해 522%에 이르는 반덤핑 관세를 물리면서 현대제철·포스코 등 국내 철강사에도 최대 48%에 달하는 관세를 부과했다. 이번에 반덤핑 관세 부과 품목이 된 물품은 내부식성 철강재(도금판재류)로 자동차 생산에 주로 쓰인다. 철강 업계의 한 관계자는 “미국이 겨냥하고 있는 곳은 중국이지만 철강 과잉생산 국가인 한국도 이 과정에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며 “500%가 넘는 사실상 금수조치에 해당하는 제재의 칼날이 한국을 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미국 정부는 지난해 전 세계에서 초과생산된 철강 7억톤 대부분이 중국과 한국 등 동아시아권에서 생산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산 철강제품에 반덤핑 관세를 부과하거나 세이프가드를 발동한 국가는 비단 미국만이 아니다. 7일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올 들어 한국산 철강제품 수입규제에 나선 국가는 미국(3건)과 인도(3건), 대만(3건), 태국(1건) 등 모두 4개국이다. 총 17건의 수입규제 중 12건이 철강제품이다. 무역협회 관계자는 “공급과잉이 심한 철강은 당분간 무역전쟁의 중심에 놓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수출길이 막힌 중국산 철강제품이 국내시장으로 들어오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 중국은 지난해 한국에 총 1,373만톤의 철강제품을 수출했으며 가격경쟁력을 앞세워 점차 시장 지배력을 높여가는 추세다. 수입 철강제품 중 중국산의 비중은 이미 50%가 넘는다.
미중 통상마찰이 국내 철강산업의 수출 및 내수시장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면서 철강 업계의 선제적 구조조정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경제단체의 한 고위관계자는 “통상전쟁이 본격화되면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한국은 어느 편도 들 수 없게 된다”며 “갈등이 더욱 고조되기 전에 정부와 민간 업계가 머리를 맞대고 서둘러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동차·IT 분야로 통상전쟁 확전 가능성도=문제는 철강뿐 아니라 다른 업종에서도 통상마찰이 심화할 가능성이 점증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철강을 비롯해 한국산 제품에 대한 수입규제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지난 2010년에는 7건에 불과했지만 지난해 32건으로 네 배 이상 늘었다.
전문가들은 철강·석유화학·섬유 등 공급과잉 분야에 이어 자동차·정보기술(IT) 분야로 통상마찰이 전이될 가능성에 주목한다. 이미 IT 분야에서는 특허를 무기로 기업 간 분쟁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고 자동차도 친환경차 시장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국가 간 경쟁이 격화될 경우 각종 규제를 앞세운 비관세 장벽이 높이 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미국 환경보호청이 폭스바겐 디젤차의 배기가스 조작 문제를 터뜨린 것은 환경보호 차원을 넘어 유럽산 경유차의 점유율 확대를 저지하기 위한 의도라는 해석이 분분했다.
특히 미국 내수시장이 호조를 보이고 있고 국내 업체가 현지 생산기지를 구축해 생산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한 만큼 통상마찰 가능성은 아직 높지 않지만 미국 의회가 한국과의 자동차 무역적자에 대해 예의 주시하고 있는 만큼 향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가입 과정에서 언제든지 통상마찰이 불거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여기에 중국 정부는 올해 초 한국 업체가 주력으로 생산하는 전기버스용 배터리에 지급하던 보조금을 안 주기로 한 데 이어 최근에는 자신들이 만든 조건을 충족하는 ‘배터리 사업자’로 등록한 업체에만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등 자국 전기차 관련 시장을 외국 업체에 순순히 내주지 않겠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김기찬 가톨릭대 경영학과 교수는 “과거 전례를 볼 때 경제성장률이 떨어지면 반드시 국가 간 무역마찰이 발생했다”면서 “보호무역 기조가 강조되는 미국 대선이라는 정치 이벤트와 중국 경기 둔화가 겹치면서 글로벌 통상마찰이 심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단기적 대응보다는 외교·통상 분야에서 국제적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샌프란시스코=김영필 아테네=이종혁 호찌민=이혜진 도쿄=성행경기자 서일범기자 saint@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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