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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한국판 골드만삭스의 조건

[데스크 칼럼] 한국판 골드만삭스의 조건

권구찬 증권부장




권구찬 증권부장

블랭크파인회장 구제금융 받고도 건재

실패 용납 없는 한국에선 상상 못해

덩치경쟁은 필요조건 일뿐 충분조건 아냐

노하우 네트워크 인적자원 중요

한국판 골드만삭스. 얼마 전 금융위원회가 초대형 투자은행(IB) 육성방안을 내놓자 다수의 신문 제목에 담긴 표현이다. 시중 은행에 익숙한 일반인이 보기에 IB 개념이 어려우니 글로벌 IB의 대명사 격인 골드만삭스를 끌어다 쓴 것으로 짐작된다. 기실 금융위원회는 지난 2일 관련 브리핑에서 골드만삭스의 ‘골’자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국판 골드만삭스가 낯설지 않은 것은 정부가 지난 10여년간 자본시장 육성방안을 내놓을 때마다 유태계 투자은행 모델을 낡은 레코드판 틀듯 들먹였기 때문이다. 골드만삭스 모델은 참여정부 시절 동북아 금융 허브 구상의 핵심 키워드였고 MB정부가 추진한 자본시장 통합작업의 아이콘이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산업은행이 망한 리먼브러더스를 인수하겠다고 덤벼들면서 글로벌 IB 만들기는 절정에 달했다.



글로벌 IB 구상을 구체화한 첫 작품은 2013년 나왔다. 자기자본 3조원 이상 5개 증권사에 ‘종합금융투자사업자’라는 난해한 업역을 신설한 게 그것이다. 금융당국은 3조원으로는 성에 안 차는지 지난주 4조원과 8조원짜리 초대형 IB를 만들겠다고 했다. 좋게 말하면 정책 일관성 유지이지만 집념 내지 집착 같은 느낌이 든다.

자본시장의 역사가 일천한 우리에게는 이름만 들어도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골드만삭스는 ‘넘사벽’ 같은 존재다. 아무래도 미증유의 외환위기를 겪은 것이 결정적인 것 같다. 국내 기업들이 헐값으로 팔려나가고 인수합병(M&A) 업무는 글로벌 IB의 독무대였으니 말이다. 천문학적 차액을 남기고 떠난 대형 헤지펀드를 닭 쫓던 개처럼 씁쓸히 지켜보면서 ‘그럼 우리는 뭐지’라는 질시 섞인 자괴감은 ‘우리도 해 보자’로 이어진 것이다. ‘한국은 역시 봉이야’라며 속으로 비아냥댈 것을 생각하면 부아가 치밀었을지도 모른다. 외환위기 직전 외화자금과장을 맡아 글로벌 금융자본의 쓴맛을 본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이 국장 시절부터 한국판 골드만삭스를 입에 올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면 한국판 골드만삭스의 조건은 무엇인가. 금융당국이 얼마 전 내놓은 것처럼 덩치의 경쟁력은 중요한 요건이다. 밑천인 자기자본이 두둑해야 통 큰 베팅으로 모험을 걸 수 있다. 자본시장이 양 떼가 뛰노는 초원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글인 이상 이런저런 규제로 옭아맨다면 플레이어들의 손발을 묶어두는 격이다. 해외에서 먹거리를 찾으라고 등 떠밀고서는 외환 건전성 잣대를 들이대거나 외화 유출을 걱정하다가는 말짱 도루묵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대형 IB로 가는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글로벌 IB는 노하우와 네트워크·인적자원이 생명이다. 140여년 역사의 골드만삭스는 1930년 대공황과 2차례의 세계 전쟁, 숱한 금융위기를 경험하면서 진화해왔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사망 일보 직전까지 갔지만 100억달러의 구제금융을 1년도 채 안 돼 갚아버렸다. 몇몇 경쟁자들이 사라지면서 내공은 더 단단해졌다. 쓰레기 같은 모기지 파생상품을 팔아치운 로이드 블랭크파인 골드만삭스 회장은 와병 중임에도 10년째 건재하다. ‘돈 버는 기계’로 불리는 그를 대체할 인물이 없어서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우리 제조업이 개발시대에 가용자원을 한데 몰아줘 일취월장했지만 자본시장에서의 퀀텀 점프란 여간해서는 어렵다. M&A만으로도 해결하지 못한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 일본 노무라증권이 리먼브러더스 미국법인을 인수했지만 월가의 스타들은 죄다 떠나버렸다.

노하우 축적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투자 실패를 우리 사회가 얼마나 성숙한 문화로 수용하느냐이다. IB가 사고 쳤다고 규제부터 챙기는 당국, 그렇게 하도록 등 떠미는 정치권과 여론의 비판에 모험 자본은 당해낼 재간이 없다. 망망대해 10곳의 광구 가운데 1곳만 상업적 채굴이 가능하다면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음에도 9곳의 실패를 우리 사회는 아직 용납 못하지 않는가.

덩치가 크다고 반드시 모험 자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금융당국이 인내할 용기가 없다면 초대형 IB 육성은 1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메아리 없는 구호에 불과하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실러 교수의 말마따나 ‘야성적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긴요한 과제다. /chand@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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