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훈요십조(訓要十條)’가 고려 태조 왕건이 자손들을 훈계하기 위해 남긴 것으로 배웠다.
그러나 필자는 훈요십조가 실제로 왕건의 유훈이 아니라 거란의 침입을 피해 나주로 몽진(蒙塵)한 현종이 피난 중 충성을 바친 이 지역 출신 인사들을 중용하자 위기감을 느낀 특정 세력이 이를 견제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며 금강 이남 출신 인사들의 관직 배제를 명시한 제8조가 결정적인 증거라고 확신한다.
훈요십조가 가짜라고 보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고려의 건국과 왕건에게 큰 영향을 미친 신라의 도선국사는 금강 이남인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고 왕건을 대신해 장렬히 전사한 신숭겸도 금강 이남인 전남 곡성에서 태어났는데 왕건이 이들을 폄하할 이유가 전혀 없고 왕건 자신도 나주를 외가로 하는 혜종에게 왕위를 물려줬다는 점이다.
둘째, 고려 8대왕 현종에 이르러서야 훈요십조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태조 왕건부터 7대 목종까지는 존재 자체가 없다가 제8대 현종 때 갑자기 등장한다는 사실이 훈요십조의 신뢰성을 결정적으로 떨어뜨린다.
셋째, 풍수 이치 면에서도 타당성이 없다는 점이다.
훈요십조는 고려 현종 때 거란의 2차 침입(1010년, 현종 1년)으로 당시 수도 개경이 함락되면서 개경에 보관돼 있던 ‘고려실록’이 화재로 소실돼 실록을 재편찬할 때 최제안이 최항의 집에 있던 문서라며 가져와 오늘에 이른 것이다.
현종이 즉위하기 전부터 훈요십조가 있어 지금의 금강 이남 지역을 불신했다면 나주로 결코 몽진하지 않았을 것이다.
훈요십조 제8조는 풍수 이치 면에서도 터무니없는 억지다.
‘산형(山形)과 지세(地勢)가 모두 배역(背逆)하니 인심 역시 그러하다’고 했는데 산형의 배반이라면 사신사(四神砂), 즉 좌청룡·우백호·후현무·전주작의 전체 혹은 일부가 혈판(穴坂)을 보기 좋게 감싸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감싸지 않았거나 감싸는 듯하다 밖으로 달아나는 모습을 취한다는 것이다.
특정 지점에서 사신사는 배반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원문 그대로 금강 이남의 모든 사신사가 배반해 훌륭한 인재가 배출될 수 없었다면 왕건을 도와 고려를 개국하고 고려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재 중 적지 않은 수가 금강 이남 지역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없는 모순에 빠진다.
‘지세가 배역했다’는 말 또한 풍수에 무지함을 드러내는 말이다. 풍수에서는 물이 최대한 늦게 빠져나갈 수 있는 구조를 길(吉)하게 본다. 한반도의 지세는 동쪽이 높고 서쪽은 낮으며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구조로 돼 있다. 이 같은 지세에서 부분적으로 남쪽 지형이 높아 물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거나 혹은 서쪽 지형이 높아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모습을 보이면 소위 ‘물이 거꾸로 흐르는 역수길지(逆水吉地)’가 된다. 서쪽에서 동쪽 중랑천으로 흘러드는 서울 청계천이 역수의 대표적 사례다.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훈요십조가 하루빨리 모든 국사 교과서에서 사라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송권호 조선역학경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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