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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秋 영수회담 백지화] 80년 '서울의 봄'...87년 6월항쟁 때도...고비마다 野대립으로 정권잡기 실패

[역사속 '야권분열 트라우마']

영수회담 철회 불구 野공조 삐끗

"단일대오 불발땐 동력 떨어져

또 남 좋은일만" 우려 목소리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 /연합뉴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연합뉴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제안한 박근혜 대통령과의 영수회담이 당내 반발로 불발에 그치면서 야당과의 공조에도 균열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국민의당·정의당은 추 대표의 야권과 사전 합의 없는 회담 제안에 강력 반발하면서 앞으로 야권의 찰떡 공조가 물 건너 간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실제 야권의 분열은 지난 민주화 과정 고비 고비마다 나타나 적전분열 양상을 보이면서 정권창출에 실패한 경험이 있다. 지난주 말 100만명의 시민들이 서울 도심에 모여 박 대통령 퇴진 등을 외치는 촛불집회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이 버티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야 3당은 공조를 통한 단일대오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하지만 영수회담 결렬 여파로 야권의 공조에 금이 갈 가능성이 커지면서 “이번에도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야권에서 나오고 있다.

야권 지도자들 간의 대립과 갈등으로 민주화의 도래가 지연된 굴곡 진 역사의 흐름에는 고(故) 김영삼(YS), 김대중(DJ) 전 대통령이라는 거목이 자리하고 있다. 군사정권에 맞선 반(反)독재 투쟁 열기가 고조되던 1979년 5월 YS는 DJ의 지원을 등에 업고 당시 야당이던 신민당의 총재 자리에 오른다. 이들의 담대한 연대는 유신체제의 붕괴를 앞당기는 기폭제가 됐지만 막상 YS와 DJ는 그들이 그토록 열망하던 민주화를 목전에 두고 적전 분열했다.

성큼 다가온 ‘서울의 봄’을 느끼면서 서로 국가 최고지도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방심한 사이 둘은 광주학살의 비극만 목도하고 신군부에 정권을 내주고 만 것이다. 정치권 관계자는 “1979년 12·12쿠데타 이후에 맞은 ‘서울의 봄’은 군부세력의 정권 연장 가능성과 민주화의 가능성이 위태롭게 공존하던 시기였다”며 “YS와 DJ가 그때 힘을 뭉쳤더라면 한국 현대사에 전두환·노태우 정권은 등장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결정적인 순간 YS와 DJ의 분열상은 1987년에도 그대로 반복됐다.

이들은 들불처럼 확산되던 민주항쟁의 열기를 업고 그해 6월 대통령 직선제를 마침내 쟁취했지만 야권 단일화 후보를 내는 데 실패한 후 DJ가 탈당해 평화민주당을 창당, 대선 출마를 강행하면서 군부세력의 후계자인 노태우 당시 민주정의당 후보에 승리를 헌납했다.

아울러 두 지도자가 영원히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된 3당합당(1990년)은 민주화 세력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긴 사건이었다. 여소야대 국면을 역전시키려는 집권당의 전략 아래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YS,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가 손을 잡고 민주자유당을 출범시킨 것이다.

일생을 건 승부수로 YS는 1992년 결국 대선 승리를 거머쥐었지만 정통 민주화 세력에 의한 평화적 정권 교체는 그만큼 뒤로 늦춰지는 결과를 낳았다.

/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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