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한 권력의 민낯이 처음 드러났을 때 국민들은 그저 아연실색했다. 하지만 거대한 실체를 덮었던 베일이 벗겨질수록 국민들은 몸 둘 바를 몰라 하기 시작했다. ‘잘못은 최고 권력자와 측근들이 했는데 부끄러움은 왜 우리 몫인가’ 하는 한탄이 쏟아졌다. 부끄러움은 이내 분노로 변했다. 주말마다 광장의 촛불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싸늘한 눈비를 맞으면서도 함께 함성을 지른 사람들은 벅찬 연대감을 느꼈다.
하지만 부끄러워하고 분노한다고 해서 모두가 광장에서 함께할 수는 없는 일이다. 각기 다른 사정으로 연대의 촛불 광장에 마음만 보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어린 자녀나 아픈 가족을 돌봐야 해서, 가게를 열어야 해서 혹은 직접 참여까지는 내키지 않아서 등 사정은 제각각이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벅차오름을 느낄 때 함께하지 않거나 못한 이들의 마음에는 미안함이 대신 자리 잡는다. 묘한 죄책감 탓에 주말 외출이나 쇼핑·외식이 꺼려진다는 사람들도 있다. 지난주 말 저녁, 한 지인은 치킨 배달 주문을 포기했다고 한다. 초겨울 추위 속에 모인 사람들이 TV 화면에 가득한데 차마 그 앞에서 따끈한 치킨을 뜯을 수 없었다고 했다. 집 근처의 한 상점은 엄중한 시국에 혼자 분위기를 내는 것 같아 올 크리스마스에는 트리 장식을 하지 않기로 했다. 굵직한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연말이면 늘 내놓던 소소한 고객 대상 이벤트조차 ‘눈치 없다’는 비난을 들을 것 같아 포기했다는 곳이 많다. 유죄인 자들은 여전히 뻔뻔한데 무죄인 국민들은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뒤범벅된 불편한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모순된 일상이 계속되는 요즘이다.
문제는 죄 없는 국민들의 착한 ‘자숙(自肅)’이 지속되면서 가뜩이나 좋지 않은 내수 경제가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달 소비자심리지수는(CCSI)는 95.8로 전월(101.9) 대비 6.1포인트나 급락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강타했던 지난 2009년 4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실제로 내수 소비의 바로미터 중 하나인 백화점 매출은 이달 들어 매주 전년동기 대비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 연말 특수에 기대어 한철 장사를 해야 하는 영세업체들의 사정은 지금 더 어렵다. 개인 사업자든 기업이든 연간 실적 달성을 위해 해가 넘어가기 전 마지막 영업에 힘을 쏟아야 하지만 차마 앓는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내년 계획은 아예 엄두도 못 내고 있다. 붕괴된 국정 시스템이 국민들의 마음을 멍들게 한 데 이어 경제까지 망가뜨리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국정 재건의 방향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29일 대통령이 정권의 운명을 국회에 떠넘기면서 정치권의 정치공학 타령은 앞으로 더 늘어지게 생겼다. 죄 없는 국민들이 자숙으로도 모자라 지체된 시간에 대한 대가까지 또 치러야 하나.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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