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중국 강소성(江蘇省) 연운항시(連雲港市) 초청으로 한·중 기업인 교류 행사에 참가한 일이 있었다. 연운항은 청도와 상해의 중간쯤에 위치한 도시로, 위도상으로는 우리나라 목포와 같으며 겨울인데도 기후는 비교적 온화했다. 황해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이곳은 아주 오래 전에는 우리나라와 매우 깊은 인연을 맺었던 곳이다. 특히 연운항시 동해현(東海縣)은 과거 재당(在唐) 신라인(新羅人)들이 거주했던 지역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9세기 무렵 일본인 승려였던 원인(圓仁)의 기행문인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를 보면 동해현의 숙성촌(宿城村)에서 신라인들을 만난 일화가 나온다. 이 촌락은 현재 연운항시 운대산(雲台山)의 줄기인 숙성산(宿城山)의 서남쪽 부근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침 안내를 했던 시의 상무국 관계자도 “연운항에는 신라시대 장보고의 유적들이 있다”는 등 한국과의 유관성을 설명하느라 애썼다. 그러나 이동하는 차 안에서 본 동해현이나 관남현 등 연운항 시내의 풍경은 중국 여느 도시와 다를 바가 없었다. 특별히 한민족과 연관 지을만한 풍광도 정취도 느끼지 못한 채 흙먼지 날리는 대륙 특유의 뿌연 바람만 손가락 사이로 잠시 잡았다 놓아주었다.
그러나 직감적으로 1천여 년 전 한민족의 향수를 느끼게 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들의 모습이나 풍광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잔의 술에서였다. 현 청사에서 주관한 만찬 자리에 “연운항시를 대표하는 명주”라며, ‘탕고우시창(湯溝世藏)’이라는 술이 나왔다. 이 술은 연운항시 남쪽에 위치한 관남현에서 생산하는 것으로 알코올 도수 42%의 투명한 백주였다. 그동안 중국의 술은 중국 음식에나 어울리는 것이라는 무의식이 다소 깔려 있었던지, 주최 측이 은근한 자부심을 가지고 권했을 때에도 특별한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술은 중국 음식은 물론이고 한국이나 일본 음식과도 잘 어울리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에는 알코올 도수에 비해 목 넘김이 매우 부드러웠다는 사실도 있었지만, 기분 좋은 씁쓸함이 음식의 맛을 전혀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개운한 여운을 남겼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잃어버렸지만 우리 술도 원래는 이런 기품과 풍미를 지녔으리라. 중국 만당기(晩唐期) 시인이었던 옥계생(玉溪生) 이상은(李商隱, 812~858)의 시(詩) 가운데 “신라의 술을 한잔 마시니, 차가운 서리 기운 녹는 듯하네(一盞新羅酒 凌霜恐易銷)”라는 구절이 나온다. 한국의 술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 당(唐)이나 원(元) 등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어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 이전 일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신라주(新羅酒)나 고구려주(高句麗酒)가 거꾸로 중국 수(隋), 당(唐)을 비롯하여 남북조시대 이전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할 수 있다. 그것은 고구려는 중국 수나라를 멸망시킬 정도로 강대국이었고, 신라방과 신라촌은 산동반도를 비롯해 양쯔강 유역과 강회(江淮)지방에 널리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베트남과 운남성(雲南省)까지 뻗어 있는 고구려 유민의 발자취까지 따라가면 고대 한민족 디아스포라는 그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 이제와 애석한 것은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끼쳤든지 간에 중국에서 내려오는 술은 원형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과학화와 산업화를 이룩한 반면 대부분의 한국 술은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사실 목 넘김이 부드러운 것은 세계적인 명주들이 갖는 일반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기술과 장치를 뒷받침해주면 가능한 일이고, 완숙(aging) 기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돈과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이다. 하지만 씁쓸하되 구수하고, 볏짚을 태운 듯 매케 하지만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곡주 특유의 향을 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를 위해 중요한 점으로는 증류할 때 ‘술밑으로 어떤 재료를 쓸 것이며, 어떻게 가공하여 발효시킬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 인공적인 향이나 맛을 가미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현재 많은 양조장들이 채택하고 있는 인공적으로 접종한 단일균을 사용해서는 결코 나오지 않는 법이다. 다시 말해 과학화와 산업화라는 이름 아래 생산성이나 균질성 등을 앞장세우지 않고, 어렵더라도 생태의 복잡계를 인정하고 수용해야 가능한 일이다. 적어도 중국 연운항의 술은 전통문화자원을 훼손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가변성과 특수성을 배제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산업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자연계는 보편성(Universality)과 다양성(Diversity)이라는 두 개의 축이 작용하고 있다. 보편성이 불변의 진리에 접근하는 방법을 제시할 수 있는 축이라면, 다양성은 자원을 현명하게 이용하고 새로운 효용창출과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는 축이다. 그동안 정부와 산업계에서는 전통문화자원의 과학화와 산업화에 많은 애를 써왔다. 지금까지 노력이 서양 과학에서 말하는 일반적인 보편성을 추구하는 데 치중했던 것이라면, 앞으로는 다양성과 특수성에 기초하여 여러 분야에 응용 가능한 융합 연구를 더해주었으면 한다. 우리가 마시는 술 한 잔에는 단순한 알코올만 담겨있는 것이 아니다. 술잔 속에는 인류의 문명사와 문화교류사가 그대로 담겨있다. 어쩌면 한잔 술에서 새로운 기술 분야를 개척할 수 있는 열쇠뿐만 아니라, 갈등과 균열이 일어나는 세상사를 극복해나갈 지혜를 얻을지도 모른다. /이화선 사단법인 우리술문화원장, friendseou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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