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모씨는 지난 2008년 전 직장동료 2명과 함께 국제화물운송주선업체를 창업했다. 이 업체는 외국 업체들의 전시품을 국내에서 들여온 뒤 국제전시회가 끝나면 반출하는 일을 주로 했다. 쉽지 않았다. 업력이 짧다 보니 창업 초기에는 물량 받기도 힘들었다. 김씨는 발로 뛰면서 영업력을 넓혔고 어느덧 대형 전시회 물량을 소화하는 알찬 소기업으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최근 관세청에서 날벼락 같은 통지서가 날라왔다. 김씨 회사가 지난 5년간 관세법에 어긋난 부당 감면을 받아왔다며 1억1,000만원을 추징금으로 내라는 내용이었다.
관세청이 뒤늦게 5년치 세금을 부과한 것은 법규 해석 때문이다. 관세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전시품은 행사의 주최자 또는 참가자가 신청하는 경우에 한해 감면 대상이 된다’고 적시돼 있다. 관세청은 김씨 회사같이 국제화물주선업자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해석을 내린 것이다. 관세청은 부당감면 받은 업체들을 조사해 총 11개 업체에 대해 47억원의 추징 절차도 밟고 있다. 지금껏 관행적으로 감면 신청 대상자에 국제화물주선업체도 해당하는 것으로 해석을 내려오다 이를 뒤집은 것이다. 김씨는 “행사 주최 측은 해외에서 반입하는 물품에 대한 도난·파손 우려로 직접 관여하지 않고 해외 참가업체는 사업자등록번호가 없어 세금감면을 신청하기 어렵다”며 “관세청도 이 같은 현실을 알고 있어 그동안 용인해왔는데 갑작스레 해석을 바꾸면서 업계가 심각한 어려움에 처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 국내 한 대형 회계법인에서 20년을 근무했던 서모씨는 2015년 P2P 대출업체를 창업했다. P2P 대출업은 개인투자자들에게서 자금을 모아 돈이 필요한 대출자에게 10% 안팎의 중금리 대출을 하는 형태다. 은행 대출이 어려운 신용등급 4~6등급이 주 대상자이다. 서씨는 대형 회계법인에서 서민금융지원 등의 업무를 맡아온 바 있어 이 사업에서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 자금 공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자산운용사·저축은행 등 제2금융권에서 자금을 공급받아 투자하는 형태의 사업구조도 세워놓았다. 서씨가 처음 금융위원회에 이 같은 의견을 내놓자 금융당국에서는 핀테크 활성화를 위해 적극 도와주겠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기관투자가 자금을 유치하기 위해 금융감독원에 신청했더니 금감원 각 부처마다 서로 다른 이유를 대며 불허 판정을 놓았다. 서씨는 금융위와 금감원을 수차례 방문하며 법규 해석의 부당함을 호소했지만 금융당국은 복지부동이었다. 이러는 동안 시간은 흘러갔고 서씨는 회사 창립자금 20억원 가운데 사업은 시작도 하지 못한 채 13억원을 허공에 날렸다. 서씨는 “금융당국 내 부서 간 엇박자로 모든 게 다 막혀 있어 답답하고 억울하다”고 토로했다.
김씨와 서씨의 사례처럼 행정부처 공무원들의 행정편의주의적 해석과 핑퐁게임에 제대로 사업을 하지도 못한 채 쓰러지는 일이 중소·벤처업계에서는 낯선 일이 아니다. 특히 대통령 탄핵 이후 권력 공백기인 요즈음 일선 공무원들 사이에 극단적인 보신주의가 만연하면서 기업들의 어려움은 더욱 가중되고 있는 실정이다.
기업들이 관련 업무를 해당 부처에 문의하면 법규의 취지와는 달리 지나치게 문구에만 집착한 해석을 내놓기 일쑤다. 민간기업인 출신의 이근면 인사혁신처장이 2014년 취임하면서 “적극적으로 행정을 하는 과정에서 생긴 과실에 대해서는 징계를 줄여주는 대신 소극행정으로 국민들에게 피해를 줄 경우 중징계하겠다”고 공직사회에 새로운 문화를 접목시키려 했지만 공직사회의 보신주의는 오히려 더 강화됐다. 한 대형 금융지주 임원은 “정부 규제를 보면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며 “핀테크 육성 등 정부에서 발표한 내용은 그럴듯하지만 막상 사업단계에서는 감독규정에 대한 행정편의주의적 해석으로 인해 실행이 불가능할 정도”라고 설명했다.
이명박 정부의 ‘규제 전봇대 뽑기’, 박근혜 정부의 ‘손톱 밑 가시제거’ 등 역대 어느 정부 할 것 없이 강조해온 규제철폐의 효과도 미미하다. 일부 규제는 없어지기도 했지만 세월호 참사, 땅콩 회항 등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대형사건·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재발방지라는 명분으로 새로운 규제가 추가됐기 때문이다.
규제 만능주의는 수치로도 나타난다. 법제처에 따르면 법령·대통령령·총리령 등 법령 수는 2012년 3,929개였지만 2016년 4,337개로 증가했다. 매년 70~150개가량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규제개혁위원회를 통해 규제가 과도하게 발생하지 않도록 제도적 절차를 마련했지만 국회 입법 등으로 새로운 법규가 계속 생겨나면서 무용지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정부의 발표와는 달리 기업인들이 체감하는 규제장벽은 여전한 것이다. 실제 국민권익위원회에서 2014년 공공기관 민원처리 국민의식을 조사했더니 전체 응답자의 51.3%가 ‘결과에 불만족한다’고 답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규제 혁신을 위해 현재보다 더 높은 수준의 개방과 협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앞서 서 씨의 사례처럼 한 부처의 여러 부서에 걸쳐 있는 업무의 경우 부서 간 개방과 공유만 제대로 이뤄지면 기업인을 위한 적극 행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김근세 성균관대 행정학과 교수는 “정부의 행정 서비스 제공 형태는 여전히 공급자 위주이며 행정편의주의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며 “개방과 공유를 강조한 정부 3.0의 취지대로 부처 내 의사협의체 기구를 확대하고 협치의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공무원들이 법규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현재보다 권한을 강화하고 신분도 보장해줘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임도빈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최순실 사태와 새 정부의 조직개편 우려 등으로 공무원들의 사기저하와 무기력증이 팽배해졌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며 “정치권력의 부당한 영향력을 줄이는 대신 공무원의 재량권을 확대해 자발적으로 민원인들에 대한 적극 행정이 가능하도록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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