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방향이 맞고 꼭 필요한 정책이라도 민심(心民)이 들끓고 정치권에서 으름장을 놓으면 이제는 못합니다. 공무원 한 명 옷 벗는 건 일도 아니잖아요.”
정부의 한 고위공무원은 현 정부 들어 여러 번 오락가락한 정책들을 두고 “솔직히 (민심과 정치권이) 겁난다”고 털어놓았다. 방향이 수시로 바뀌는데 뭇매를 맞아가면서 배짱 있게 추진할 용기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에서 정책이 번복되며 사회적인 비용만 치른 일은 한두 개가 아니다.
우리나라 전체 근로자 가운데 절반(48%·802만명)이 소득세를 한 푼도 내지 않는 면세자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정부가 지난 2013년 세법을 개정해 연말정산 제도를 세금을 매기는 대상인 전체 소득액(과표)을 줄여주는 소득공제 대신 내야 하는 세금에서 일정 비율을 줄여주는 세액공제로 바꾼 것이 화근이었다. 세액공제는 연봉이 높은 중산층 이상(5,500만원)의 세 부담이 늘어나는 것으로 설계됐다. 하지만 5,500만원 이하 직장인도 세액이 늘었다며 민심이 폭발하자 정치권과 정부는 곧바로 보완책을 내놓았다. 결국 근로소득세를 면제받는 수는 세법 개정 전인 2013년보다 270만명 이상 늘었고 1억원 이상 연봉자 가운데서도 면세를 받는 직장인이 1,400명을 넘어섰다. 면세자 비율은 32%에서 48%로 치솟았다. 기획재정부의 한 간부는 “당시 5,500만원 이하 근로자의 85%는 세 부담이 늘지 않거나 되레 감소했다”며 “하지만 어떻게 하겠느냐”고 푸념했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 문제를 두고도 무원칙을 보여줬다. 정부는 지난해 사드가 들어설 부지를 여론 수렴 없이 경북 성주군 성산포대로 결정했다. 이후 주민 반발이 극심해지자 민간기업 롯데가 보유한 롯데스카이힐 골프장과 국유지를 맞교환하는 방식으로 배치지역을 변경했다.
국가 에너지 정책도 ‘대중영합주의(포퓰리즘)’에 흔들리고 있다. 온실가스 감축과 미래산업인 신재생에너지를 육성하기 위해 우리 정부는 2013년 6차 전력수급 계획을 내놓고 풍력발전을 오는 2027년까지 1만6,679㎿를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풍력발전소가 들어서는 지역마다 소음 등을 이유로 반대가 거세지자 정부는 2015년 내놓은 7차 계획에서 풍력발전 설비 목표를 7,450㎿로 절반 이상 줄였다. 원전도 마찬가지다. 삼척시는 자원해서 원전 부지로 지정됐지만 이후 지자체장이 바뀌자 ‘원전 반대’를 외치며 민간 주도의 주민투표를 강행했다. 정부는 지역 눈치에 추가 원전 부지를 아직 지정하지도 못한 상황이다.
학계에서는 정책과 정책 혼선으로 우리가 치르는 비용은 엄청나다고 지적한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우리나라의 사회적 갈등을 주요7개국(G7) 수준으로만 개선해도 경제성장률이 지금보다 0.3%포인트 높아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현재 3% 이하로 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잠재성장률을 감안할 때 갈등비용만 줄여도 3% 성장은 가능하다는 얘기다. 2015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하위 20% 수준인 우리나라 국가갈등관리지수(0.38)를 10%만 개선해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1.75~2.41% 증가시킬 수 있다고 분석했다.
문제는 앞으로다. 사상 초유의 대통령 파면 사태 이후 정권 공백기를 맞고 사실상 대선에 돌입한 지금이 가장 정치와 정책의 불확실성이 커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정치의 불확실성이 커지면 소비자심리지수(CSI)와 기업경기실사지수(BSI)는 각각 2.9%, 2.0% 하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래에 대한 예측이 어려워지면서 소비심리가 위축되고 기업은 투자를 꺼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여섯 번의 대선이 있던 해는 전년에 비해 민간소비(0.6%포인트)와 설비투자(4%포인트)가 줄어 평균 경제성장률이 0.5%포인트가량 줄었다. 2% 중반대의 경제성장률을 전망하는 올해는 불확실성만 줄여도 3%대의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는 얘기다.
결국 유력 대선주자들이 선명하고 예측할 수 있는 정책을 내놓아야 우리 경제가 더 나아갈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했다. 국민들이 반발했지만 결국 국가 전체적으로는 큰 이익을 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같은 굵직한 정책을 펼 수 있기 때문이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대권주자들은 앞으로 두 달 동안 표를 얻기 위해 선심성 정책을 내며 총공세를 벌이고 우리 경제는 방향성을 못 잡을 것이 확실하다”며 “집권 이후를 생각한다면 선명한 국정철학과 정책 방향을 보여야 질서가 보이고 경제에도 이롭다”고 말했다. 김용철 부산대 정치학과 교수도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는 항상 예측 가능하고 누구도 이해할 수 있게 상식적인 사회여야 한다”며 “여론과 다르더라도 꼭 필요한 정책은 확고한 원칙을 세워서 추진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경우기자 bluesquare@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