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조선사가 선수금환급보증(RG)을 민간은행에서 발급받았다면 신용도가 더 높은 민간은행이나 국책은행으로 옮기기를 종용하지 않겠어요? 이런 것들은 결국 가격을 더 후려치기 위한 수순 밟기라고 봐야죠. 국내 조선사로서는 계약 따기가 이전보다 훨씬 까다로워졌어요.”
5일 만난 국내 대형 조선 업체 임원은 수주 여건이 미묘하게 바뀌고 있다고 짚었다. 발주처들이 대놓고 말하지 않지만 내심 북핵을 비즈니스에 활용하려는 기류가 감지된다는 것이다. 그는 “북핵 위기의 현실화 가능성은 차치하고라도 선주로서는 경쟁 업체를 지렛대 삼아 한국 업체와 협상할 여지가 커졌다”고 지적했다.
이는 북핵 리스크가 실물경제로 생각보다 빨리 전이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내 조선사 입장에서는 구조조정과 일감 절벽 와중에 수주전에서도 북핵이라는 핸디캡을 안게 돼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 북핵 리스크가 당장 해소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당분간 글로벌 수주전에서 우리 조선 업체의 고전이 예상되는 대목이다. 가뜩이나 중국 업체와의 기술격차가 크게 좁혀져 협상력에서 열세를 만회하기가 쉽지 않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통상임금 판결 등으로 백척간두의 위기에 내몰리고 있는 자동차 업계에도 북핵은 발등의 불이다. 미국이 한미일 안보협력을 등에 업고 북한과 중국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일 수밖에 없어 중국 내 반한감정의 골이 더 깊어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이 북한과 거래하는 기업을 제재하는 ‘세컨더리보이콧’을 시행할 경우 심각한 어려움이 닥칠 것으로 본다. 북한과 거래하는 기업은 대부분 중국 기업이라 세컨더리보이콧에 따른 직접적 피해는 중국이 입는다. 한국이 미국의 세컨더리보이콧에 동참할 경우 중국 시장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불 보듯 뻔하다. 자동차 업계의 한 관계자는 “미국의 세컨더리보이콧 동참 요구에 한국이 응할 경우 한중관계는 최악으로 갈 것”이라며 “중국 시장에서 또 하나의 거대한 위기를 맞지는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국내 투자가 쪼그라들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한 대기업 고위관계자는 “북핵은 국내 리스크”라며 “한국에 투자를 하려던 해외 기업이 투자를 망설일 수 있고 이미 투자했던 곳은 (사태가 악화되기 전에) 철수를 검토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실제 외국인직접투자는 지난 2015년 165억달러에서 지난해 106억달러로 줄어들 만큼 감소세가 가파르다. 북핵이 자칫 이런 흐름에 기름을 붓는 악재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인수합병(M&A) 시장이 급격히 위축될 여지도 배제할 수 없다. 이는 산업 구조조정기에 놓인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 M&A 전문가는 “국내 매물의 인기가 떨어져 해외에서 사모펀드로 유입되는 투자금이 줄 수 있다”며 “최고조의 북핵 위기가 장기화되면 생각지 못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해외 기업의 국내 복귀, 이른바 ‘유턴’ 기업 유치도 물 건너갔다는 관측이 나온다. 정부가 유턴 기업에 대해 법인세 인하 등의 유인책을 내놓고 있지만 들끓고 있는 ‘핵 정국’에 빛이 바랬기 때문이다. 정부에 대한 쓴소리도 적지 않다. 국내 대기업들이 미국의 러스트벨트(rust belt·5대호 연안의 쇠락한 전통공업지대) 지역에 공장을 짓는 등 ‘친(親)트럼프’ 투자에 나서고 있지만 정부가 북핵을 둘러싼 정책 공조에 소홀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기 움직임 등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불만이 제기된다. 한 대기업 임원은 “어디 하나 기댈 언덕이 없다”고 푸념했다. /이상훈·맹준호기자 shle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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