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부품 기업 만도가 통상임금 항소심에서 패소하면서 경영상의 어려움을 내세운 기업에 안전장치가 돼준 신의칙 원칙이 또 깨졌다. 최근 연이어 신의칙 원칙을 부정하는 판결이 이어지면서 사법부 성향이 정부의 친노조 성향에 맞춰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불안한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손바닥 뒤집듯 1년 만에 바뀐 판결=“기아자동차 판결로 분위기가 달라질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만도 판결까지 뒤집히리라고는 예상 못 했습니다. 법원이 여론을 많이 참고한 것 같습니다.”
8일 국내 한 자동차 업체 고위 관계자는 만도의 통상임금 결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특히 만도가 지난 1년 새 경영 상황이 획기적으로 개선된 것도 아닌데 판결은 뒤집혔다. 만도는 당장 이번 판결에 따라 4·4분기 적자 전환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이번 결과에 따라 만도는 4,200여명에게 초과 수당 등 약 2,000억원 이상을 지급해야 한다. 올해 4·4분기 만도의 영업이익은 지난해 대비 21% 급감한 860억원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연간 영업익도 2,636억원으로 13.5% 감소할 예정이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사태로 중국 자동차 판매가 줄고 미국 자동차 시장이 8년 만에 판매가 축소되는 등 업황이 좋지 않은 것이 이유다. 만도도 기아차처럼 멀쩡했던 회사가 법원의 판단 여파로 한방에 적자 기업으로 돌아서게 된 셈이다.
업계에서는 법원이 치밀한 법리적 고민보다는 여론을 많이 의식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판결일을 변경한 것이 대표적이다. 당초 만도의 통상임금 소송 2심 선고일은 8월23일이었다. 기아차의 통상임금 소송 선고일인 8월31일보다 일주일 이상 앞서 있었다. 하지만 선고일은 여러 이유로 두 번 연기돼 이달 8일로 변경됐다. 그 사이 기아차에 이어 현대모비스도 통상임금 소송에서 패소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법원이 만도 자체의 사례가 아니라 최대 1조원에 달하는 기아차의 통상임금 결과를 보고 판단했다는 반증”이라며 “정권이 바뀐 것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만도 근로자들의 급여가 경쟁업체에 비해 낮은 수준일까. 올해 반기 보고서를 보면 만도의 1인당 평균 급여는 3,700만원이다. 경쟁사인 현대모비스는 3,300만원이다. 만도의 올해 반기 매출액은 2조8,000억원, 모비스는 17조원이다. 덩치가 5배 가까이 큰 모비스보다 만도가 급여 수준이 높다.
이번 통상임금 소송 결과에 따라 만도는 비상이 걸렸다. 자율주행차·전기자동차 등 자동차산업의 흐름이 달라지면서 생존을 위한 연구개발(R&D) 투자가 절실한 상황이다. 만도는 매출액의 5%인 3,000억원 전후를 매년 R&D에 투자하고 있다. 향후 금액을 늘려갈 예정이다. 정몽원 만도 회장이 최고경영자(CEO)로 복귀한 것 역시 만도의 미래에 힘을 싣겠다는 의지였다. 올해 미국 실리콘밸리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R&D 사무소를 열고 인도 R&D센터를 확대 오픈한 것도 이런 배경이다. 하지만 이번 2,000억원가량의 돌발 비용으로 경쟁에서 뒤처질 위기에 처했다.
◇통상임금 소모적 논쟁 또 이어질 듯=실제 판결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김명수 대법원장과 유남석 헌법재판소 재판관 후보자 등 진보 성향의 인사들이 사법부 요직에 앉으면서 기업들의 부담은 더욱 커지고 있다. 실제 통상임금 소송에서 이러한 변화는 정권이 바뀐 올해부터 쉽게 찾아볼 수 있다.
2015년부터 2016년까지 이어졌던 아시아나항공·현대중공업·현대미포조선·한진중공업 등의 통상임금 소송에서 1심에서 인정되지 않았던 신의칙 원칙이 항소심에서는 기업들의 경영상 어려움에 무게를 둔 법원의 판단이 줄지어 나왔다.
하지만 같은 달에 있었던 기아차 소송부터 분위기가 반전됐다. 당시 재판부는 “4,223억원을 추가 수당으로 지급해도 회사 경영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어 닷새 뒤에 열린 한국GM 사무직 근로자 1,500명이 제기한 통상임금 소송에서도 법원이 근로자 측의 손을 들어주면서 회사는 90억원을 웃도는 추가 수당을 부담하게 됐다. 이 사건 역시 1심에서는 “신의칙에 위배된다”고 판결했지만 2심에서는 이를 뒤집었다. 한국GM은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누적 당기순손실이 2조4,870억원(별도 회계기준)에 이른다. 특히 최근 2년간 순손실이 1조6,000억원에 달해 손실 폭이 갈수록 커지고 있어 재판부가 기업 현실을 제대로 검토했는지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한 대형 로펌의 기업담당 변호사는 “경영상의 어려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아직 제시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신의칙 적용 판단 기준은 재판부 성향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며 “앞으로 기업들은 사실관계나 법리만큼 재판부 성향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만큼 통상임금 관련 소송에서 기업들의 부담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노현섭·강도원기자 hit8129@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