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부처 공무원 A씨는 최근 여당 국회의원으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정책에 대한 설명을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A씨는 그날 오후 설명자료를 만들어 다음날 아침 일찍 국회로 올라갔다. 하지만 의원은 “다른 일정이 생겼으니 기다려달라”고 했고 A씨는 의원실 앞에서 대기만 하다 결국 의원은 만나지도 못하고 세종시로 내려와야 했다. A씨는 “세종시 회의 일정을 제쳐놓고 국회에 올라갔는데 의원을 만나지도 못해 허탈했다”고 전했다.
세종시 공무원들에게 A씨 같은 사례는 다반사다. 예산심의·상임위원회 시즌 때는 부처 고위공무원들도 의원실 앞에서 밤새 벌을 서다가 돌아오는 일이 적지 않다.
세종시 관료 사이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는 또 다른 청와대 정책실이나 다름없다’는 말도 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보유세 개편과 소득세·법인세 최고세율 인상. 기획재정부는 지난해 상반기만 해도 “보유세 개편은 아직 이르다”는 입장을 수차례 밝혔으나 여당 지도부가 “보유세 인상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언급하자 기류가 바뀌었다. 소득세·법인세 인상 역시 여당이 기재부 정책 기조를 바꿔 관철시킨 사례로 꼽힌다. 최저임금 인상의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신설한 3조원 규모의 일자리안정자금 역시 정부부처에서는 도입하지 말자는 의견을 냈다. 민간기업의 임금을 정부가 직접 지원하는 것은 지속 가능하지 않고 다른 부작용을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하지만 여당과 청와대에서 ‘무조건 추진해야 한다’고 압박하자 수용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국회에서 꼭 추진해야 한다고 마음먹은 사안이 있으면 ‘정부는 이의를 제기할 게 아니라 정책을 잘 추진할 방법이나 찾으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토로했다.
더욱이 문재인 정부의 내각 구성에서도 관료의 입지가 상당히 줄었다. 18개 부처와 금융위원회·공정거래위원회·방송통신위원회 등 3개 위원회 수장의 면면을 보면 관료 출신은 4명에 불과하다. 반면 여당 국회의원 출신은 7명이나 된다. 특히 이들은 행정안전부·국토교통부·고용노동부·중소벤처기업부 등 요직을 차지하면서 주요 경제정책을 주도하고 있다. 부동산정책에 있어서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의 말은 경제팀 수장인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말보다 무게감 있게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 때문에 관료들 사이에서는 “차라리 의원내각제를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부처 1급 이상은 모두 정치인이나 외부에서 채우자”는 자조 섞인 목소리들도 나온다.
문제는 국회뿐만이 아니다. 청와대에도 ‘사공’이 너무 많다. 참여정부 때는 부처 경제팀의 경우 청와대 경제수석실하고만 잘 소통·협의하면 됐지만 지금은 부활한 정책실장, 경제수석, 일자리수석 등까지 다 챙겨야 한다. 부동산정책은 사회수석, 재정·세금 관련은 재정기획관도 거쳐야 한다. 세종시의 한 공무원은 “각 수석실에 보고하는 내용은 대동소이한데 일단 모든 라인을 다 챙겨야 하니 보고 자체가 고역일 때가 많다”고 전했다. 정책실과 경제라인 등 청와대 안에서 의견이 갈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도 있다는 게 공무원들의 전언이다.
대통령 직속 위원회도 또 다른 ‘옥상옥’이다. 현 정부 들어서만 일자리위원회·4차산업혁명위원회·정책기획위원회·북방경제협력위원회 등이 신설됐고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도 위상이 크게 강화됐다. 이들 위원회가 무게감을 갖고 정책을 추진하는 경우가 많아져 결과적으로 부처들의 업무 영역이 위축됐다. 경제팀의 한 관계자는 “위원회가 강력히 추진하려는 사안은 청와대 지시만큼 잘 챙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공무원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위상을 깎아내리는 측면도 있다. 상대적으로 젊은 관료들 사이에서 ‘YOLO(You only live once·현재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라이프 스타일)’를 추구하는 분위기가 강해져 전통적인 사명감이 많이 희석됐다는 것이다. 정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금요일 오후에 일을 시키면 월요일에 나와서 하겠다는 직원도 있더라”며 “예전엔 누가 뭐라고 해도 사명감과 직업정신으로 버텼는데 요즘엔 그런 것도 사라져가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전했다.
/서민준기자 morandol@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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