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초 국민들의 불편 사항, 국민이 원하는 정책을 청와대가 복잡한 절차 없이 바로 듣고 직접 답변을 해 사회경제를 발전시켜나가겠다는 취지로 도입된 청와대 국민청원이 점차 특정 계층의 분노 배출 창구, 특정인의 해코지 수단 등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좋은 취지로 도입한 국민청원이 사회 통합 저해, 소모적인 논쟁 등으로 연결되는 상황이라고 진단하며 실명제 도입 등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가장 논란의 중심에 있는 것은 19일 밤에 청원된 ‘김보름·박지우 선수의 자격박탈과 적폐 빙상연맹의 엄중 처벌을 청원합니다’라는 글이다. 해당 글은 20일 낮12시께 청와대의 답변 의무 기준인 20만명(한 달 내)의 동의를 얻었다. 경기가 19일 오후8시에 시작된 점을 고려하면 약 16시간 만에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 역대 최단 기간 답변 기준선을 넘었다.
청원 내용을 보면 선수 개인에 대한 공격과 화풀이에 가까운 것이 많았다. 청원자는 “김보름·박지우 선수는 팀전인데도 불구하고 개인의 영달에 눈이 멀어 동료인 노선영 선수를 버리고 본인들만 앞서나갔다”며 “인터뷰는 더 가관이었다. 인성이 결여된 자들이 올림픽 대표 선수라는 것은 국가 망신이다. 김보름과 박지우의 국가대표 자격 박탈과 올림픽 등 국제대회 출전 정지를 청원한다”고 밝혔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청와대 국민 청원에 특정 개인에게 너무 큰 상처를 주는 청원이 많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날 청와대가 답변을 공개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집행유예 판결 판사에 대한 특별감사 청원도 마찬가지다. 해당 청원은 단 3일 만에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었다. 청원자는 “국민의 상식을 무시하고 정의와 국민을 무시하고 기업에 읊조리며 부정한 판결을 하는, 이러한 부정직한 판결을 하는 판사에 대해서는 감사가 필요하다”고 적었다. 하지만 엄연한 3권 분립 국가에서 행정부가 사실상 재판에 관여해야 한다는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청와대도 이날 답변을 통해 “국민감정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면서도 “하지만 삼권 분립이 엄연히 있으므로 청와대가 재판에 관여하거나 판사 개인에 대해 징계할 권한이 없다”고 밝혔다. 답변자로 나선 정혜승 뉴미디어 비서관은 “법관이 재판 내용으로 인해 파면이나 징계 등 인사상 불이익을 받을 위험이 있다면 외부 영향력이나 압력에 취약하게 되고 그럴 경우 사법부의 독립이 흔들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외에도 초·중·고등학교에서 페미니즘 교육을 의무화해야 한다는 청원도 20만명을 넘어 답변을 기다리고 있으며 국회의원 급여를 최저시급으로 책정하자는 극단주의적 발상, 나경원 의원의 평창올림픽 위원직 파면 등도 논란의 중심에 있는 상황이다.
청와대 국민청원은 초반에는 비교적 건강한 토론의 장과 이슈화를 통해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동안 답변이 완료된 것을 보면 △권역외상센터 지원 확대 △전기용품 및 생활용품 안전법(전안법) 개정 혹은 폐지 △가상화폐 규제 반대 △청소년 보호법 폐지 △낙태죄 폐지 등이었다. 이국종 아주대 교수 지원 법으로 알려진 권역외상센터 지원 확대는 국민 반향이 커 실제 지원 확대로 연결되고 있으며 전안법 개정도 국회를 압박하는 효과를 거두며 개정으로 이어졌다.
최 교수는 “여론이 이리저리 급격하게 쏠리는 광장민주주의의 폐해가 청와대 국민청원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꼬집었다. 좌승희 전 서울대 초빙교수도 “사회통합보다는 분열을 일으키고 소모적인 논쟁으로 이어지고 있다”며 “국민 청원제도 자체는 필요하지만 책임 있는 발언을 할 수 있도록 실명제를 도입하는 등의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이창원 한성대 행정학과 교수는 “국민 의견을 정책에 반영하지 않았던 그동안의 오랜 눌림에 따른 현상”이라며 “건전한 청원으로 이어지는 과도기적인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국민 스스로 ‘이 청원은 너무 비상식적이다’라고 인지할 정도로 자정 기능이 작동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태규기자 classic@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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