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87년 개봉한 공상과학(SF) 영화인 ‘이너스페이스(Innerspace)’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진 뒤 잠수정을 타고 사람의 몸으로 들어간 주인공이 우여곡절 끝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내용이다. 영화에서 공군 조종사 다크 펜델톤은 실리콘밸리의 극비 초소형화 실험을 통해 토끼의 몸으로 들어가려 한다. 이때 괴한이 습격하자 연구소장은 다크가 들어 있는 주사기를 들고 피하려다 잭의 엉덩이에 주사를 놓는다. 잭의 몸에 들어간 다크는 잠수정에 산소가 부족해지자 필사의 탈출을 시도하다가 여자친구인 리디아가 잭과 키스하는 바람에 리디아의 몸으로 이동한다. 이때 다크는 자신이 잉태시킨 태아를 보게 되고 결국 탈출에 성공한 뒤 다시 커져 리디아와 재회한다.
물론 이 영화는 과학적으로 따지면 반응 전후 질량에 변화가 없어야 한다는 ‘질량보존의 법칙’을 무시하고 ‘걸리버여행기’처럼 사람이 줄었다 커졌다 하기는 하지만 과학적·의학적으로 충분히 의미심장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 바로 다크의 잠수정처럼 초소형 물질을 인체에 투입해 밖에서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면 많은 의미 있는 진단과 치료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미래 얘기이기는 하지만 응급실에 실려 온 환자에게 의사가 주사를 놓으면 주사액에 들어 있는 수십~수백 개의 나노 분자 기계가 환자의 혈관을 타고 돌아다니며 병원균을 찾아 파괴할 수도 있다. 우리 몸속에 쇠붙이를 집어넣어 수술하면 거부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데 생체친화적 분자기계로 수술하지 않고도 미세한 움직임까지 제어해 치료할 수 있는 날이 올 수도 있다. 막힌 혈관을 수술을 통해 뚫어왔다면 막힌 부분에 초미세 분자기계를 보내 자석으로 회전시켜 해결할 수도 있다. 독감 환자나 메르스(MERS) 환자의 바이러스 등 병원균을 찾아다니며 죽일 수도 있다. 화합물로 분자의 움직임을 조절하는 분자기계는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아주 작은 영역까지 도달할 수 있어 의료 분야에서의 활용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그동안 분자기계(빛·열·자기력 등의 외부자극을 통해 회전·전진과 같은 물질의 역학적 움직임을 제어하도록 설계된 인공 분자 또는 분자집합체) 개발은 합성화학과 나노소재 분야의 오랜 도전과제였다. 하지만 자기력은 물성을 파괴하지 않는 비침입성 자극원이라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기계적 제어가 어려워 주목받지 못했다.
더욱이 펩타이드 같은 반자성(diamagnetic·물질에 자기장을 작용시킬 때 자화가 자기장의 방향과 반대로 생겨 자석에서 멀어지는 성질) 유기분자들은 수 테슬라(tesla·공간의 한 지점에서 자기장의 크기를 나타내는 단위, 자석 주위로 힘을 내는 공간의 크기는 거리 제곱에 반비례) 이상의 강력한 자기장에서도 반응하지 않아 비자성(non-magnetic) 물질로 취급돼왔다. 학계에서 반자성 물질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긴 것이다.
이런 금기를 이희승 한국과학기술원(KAIST) 화학과 교수가 깼다. 순수 유기화합 물질인 폴덱처(foldecture·아미노산의 결합체인 펩타이드 분자들이 높은 결정성과 일정한 규칙성을 갖도록 설계한 3차원 비금속 유기분자구조체)를 이용한 펩타이드 자기나침반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외부제어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 교수는 사람 몸의 주자성 박테리아 행동 양식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막대기 모양의 펩타이드 자기조립체인 폴덱처를 활용해 나침반처럼 실시간으로 자기장의 방향에 따라 정렬하는 펩타이드 자기나침반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유기화합물인 폴덱처를 이용해 생체친화적 물질인 펩타이드 자기나침반을 개발하고 그동안 주목하지 않은 자기장을 동력으로 삼는 혁신적인 분자기계 개발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다. 그는 실험을 통해 폴덱처가 MRI의 자기장 세기보다 작은 1테슬라 이하의 회전자기장에서도 실시간으로 감응해 정렬하고 수용액상에서 실시간 회전운동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실제 펩타이드 자기나침반은 30rpm 이상의 회전성 자기장을 가리켰다.
이 교수는 “단백질 등 아미노산 고분자인 펩타이드를 나침반처럼 자기장 방향에 따라 실시간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자기나침반을 최초로 개발했다”며 “신개념의 생체친화적 분자기계 개발을 통해 의학적으로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이어 “거북선처럼 배에 어떤 무기를 장착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타기팅이 가능해질 것”이라며 “다만 넉넉잡고 응용기술이 실용화되기까지 10년은 걸릴 것”이라고 분석했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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