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기아자동차 미국 공장의 감산 결정은 작게는 현대·기아차, 크게는 한국 자동차 산업의 위기 상황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현대·기아차가 어려움을 극복하려면 무엇보다도 미국 시장에서 판매를 회복시켜야 하는데 감산이라는 정반대 조치를 취한 점은 위기의 깊이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주력 차종 동반 부진=현대차 미국 앨라배마 공장은 지난해 ‘엘란트라(국내 아반떼)’ 13만1,279대, ‘쏘나타’ 13만8,276대, ‘싼타페’ 5만8,451대 등 총 32만8,006대를 생산·판매했다. 기아차 미국 공장은 자사 차종 ‘옵티마(국내 K5)’와 ‘쏘렌토’ 각각 9만6,444대와 12만1,562대를 생산하고 현대차 싼타페 7만3,975대를 위탁생산해 연간 총 29만1,981대를 만들었다.
이런 구조에서 현대차가 기아차 미국 공장에 대한 싼타페 위탁주문을 오는 5월부터 중단하면 기아차는 당장 일감이 줄어든다. 올해 1~2월 기아차가 싼타페를 7,220대 생산한 것을 감안해 단순 계산하면 올해 기아차 생산량은 지난해 대비 6만대가량 줄어들게 된다. 만약 기아차 조지아 공장이 만드는 옵티마와 쏘렌토가 지난해보다 더 안 팔리게 되면 기아차의 감산 규모는 6만대 이상으로 늘어난다.
현대차는 이르면 7월 신형 싼타페를 미국 시장에 출시한다. 신차 효과가 일정 부분 나타날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도 기아차에 대한 싼타페 주문을 끊기로 한 것은 엘란트라와 쏘나타의 판매 부진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미국 자동차 업계에 따르면 엘란트라는 지난해 판매가 전년 대비 4.9% 줄어 미국 베스트셀링카 순위에서 20위에 머물렀다. 쏘나타는 지난해 판매가 전년 대비 33.9% 감소해 베스트셀링카 31위에 그쳤다. 싼타페(DM)는 30위에 머물렀는데 올해 3·4분기 완전변경 신차(TM)가 투입되면 판매량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즉 쏘나타와 엘란트라 생산량을 조정할 수도 있어 신형 싼타페를 기아차에 위탁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기아차의 판매 사정은 더욱 심각하다. 옵티마는 지난해 2016년 대비 13.5% 감소한 51위, 쏘렌토는 전년 대비 13.1% 줄어든 55위다. 이런 상황에서 조지아 공장이 중단된 싼타페 일감을 대체할 차종을 투입하지 않겠다는 것은 일단 체화 재고부터 해결한 뒤 새 차종을 생산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美 공장 감산은 예견된 일=증권 업계에 따르면 2월 말 기준 현대차의 미국 재고기간은 3.8개월, 기아차는 4.9개월선이다. 재고기간은 공장 출고부터 판매까지 걸리는 시간인데 이 기간이 길수록 팔리지 않는 차가 쌓여 있다는 뜻이다. 일본 브랜드들이 평균 재고기간을 2.5개월 정도로 관리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상당히 길다.
전문가들은 현대·기아차의 미국 감산이 어느 정도 예견됐던 일이라고 얘기한다. 임은영 삼성증권 팀장은 “국내 공장에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차는 (노사관계상) 물량을 줄이기 어려운 면이 있다”면서 “현대·기아차가 상반기까지는 재고를 줄이는 데 집중하겠다고 한 만큼 상대적으로 컨트롤하기 쉬운 미국에서 생산을 축소할 것으로 예측됐다”고 말했다.
한때 미국에서 도요타와 혼다에 정면승부하겠다고 벼르던 현대·기아차가 이렇게 된 이유는 뭘까. 김필수 대림대 교수는 “과거 현대·기아차는 소비자 취향에 맞는 신차 적기 투입, 합리적인 가격과 높은 품질, 기발한 마케팅이라는 3박자를 잘 맞췄는데 지금은 여의치 않다”고 말했다.
회사 측은 감산을 나쁘게 볼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현대·기아차 고위관계자는 “무조건 판매대수를 확대하는 것은 회사의 경영방침이 아니고, 내실을 다지자는 게 경영방침”이라며 “미국 시장에서 재도약하기 위한 내실 전략”이라고 말했다.
기아차는 싼타페 대체물량을 내년부터 생산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기아차가 대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신차종인 ‘텔루라이드’를 내년부터 미국 현지에서 생산해 SUV 선호 트렌드에 대응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맹준호기자 next@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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