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익숙한 고전 춘향전이 발레라는 그릇에 담기면 어떤 맛과 빛깔을 낼까. 9~10일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유니버설발레단이 4년만에 재연하는 ‘발레 춘향’은 가장 한국적인 소재가 발레를 만나 새로운 신경과 근육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말 없이 몸의 언어로만 내용과 감정을 이해해야 하는 발레의 특성상 ‘백조의 호수’ ‘잠 자는 숲 속의 미녀’ 등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라도 미리 내용을 숙지 하지 않으면 무용수들이 표현하는 동작의 감성을 이해하거나 흐름을 따라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익숙한 고전을 소재로 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마임뿐만 아니라 점프나 리프팅, 발 재간만으로도 무용수들의 감정이 하나의 언어가 되어 객석으로 전해지는 놀라운 경험이 가능하다.
물론 문턱을 낮췄다는 게 발레 춘향의 유일한 장점이라 생각하면 곤란하다. 아름답고 독창적인 안무와 장면마다 꼭 들어맞는 차이콥스키의 음악, 한국의 미를 드러내는 의상과 무대 장치까지 각각의 요소들이 작품을 든든하게 떠받친 덕분에 이 작품은 세계에서 통하는 한국의 미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유병헌 유니버설발레단 예술감독이 직접 안무한 ‘발레 춘향’은 춘향과 몽룡의 섬세하고 애절한 파드되와 방자와 향단의 익살스러운 몸짓, 힘 있는 남성 군무, 매혹적인 여성 군무가 한데 어우러져 기존 발레팬들에게도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부채와 소고, 꽃바구니 등 전통무용의 소재를 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발레 동작에 한국무용 특유의 팔 동작을 가미하는 등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여기에 발레 음악의 거장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활용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벚꽃이 흩날리는 가운데 춘향과 몽룡이 첫날밤을 보내며 추는 초야 파드되에는 ‘만프레드 교향곡(Manfred Symphony, OP.58, 1885)’ 환상 서곡 ‘템페스트(The Tempest Op.18, 1873)’를 매치, 두 청춘의 애틋하고 강렬한 사랑을 표현하는데 맞춤했다.
고운 빛깔의 한복 의상은 이 작품의 또 다른 백미다. 단옷날 잔치와 초야 파드되에서 춘향의 분홍빛 치맛자락부터 마지막 재회 파드되에서 몽룡이 걸친 옥색 한복까지 “서양의 관능미가 드러내는 것이라면 한복은 한 겹 더 감추는 것”이라는 이정우 디자이너의 말대로 관능미와 우아함으로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특히 긴 치마에 트임을 주거나 치맛자락을 풍성하게 끌어올려 고정하는 방식으로 의상을 변주, 한국의 미와 발레 동작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감상하는데 손색이 없었다.
이처럼 다양한 볼거리로 무장한 무대지만 대부분의 무대 장치를 영상으로 대체한 점은 아쉬운 대목이었다. 무대 전환 없이 계절의 변화나 장소 변화를 다채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은 장점이지만 무용수들 외에 단조로운 무대를 채우는 볼거리가 없다는 점은 보완이 필요해 보인다.
유니버설발레단의 간판급 무용수이자 수석무용수인 강미선과 이현준, 홍향기와 이동탁이 9일과 10일 무대에 각각 무대에 오른다. 지난 3월 ‘스페셜 갈라’애서 초야 파드되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강미선-이현준은 이번 무대에서도 안정적인 테크닉과 섬세한 연기력으로 극의 완성도를 높인다. 홍향기는 이번 무대로 처음 춘향 역에 도전한다. 평소 당찬 연기를 펼쳐온 홍향기답게 외유내강의 춘향을 표현할 예정이다.
9일 무대에는 9개월간의 재활 이후 첫 복귀 무대에 오르는 수석무용수 강민우가 변학도 역으로 활약한다. 힘 있는 점프와 무대 장악력, 포악하고 여색을 밝히는 변학도의 품성을 드러낸 연기력은 강민우가 최상의 컨디션에 이르렀음을 시사한다. 다음 달 충무아트센터에서 개막하는 돈키호테(7월20~22일) 무대에 주역으로 복귀할 그의 무대가 더욱 기대를 모으는 이유다.
첫 창작 발레인 ‘발레 심청’에 이어 세계 속 발레 한류의 새로운 역사를 써온 ‘발레 춘향’은 올해도 세계 관객과 호흡한다. 오는 9월에는 콜롬비아 보고타 훌리오 마리오 산토도밍고 마요르 극장에 초청, 발레라는 서양의 문법을 통해 한국의 정서와 숨결을 무대 위에 펼쳐낼 예정이다.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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