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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터리] 시간의 역사

양창훈 HDC신라면세점 대표





지난주 말 깊어가는 가을을 만끽하려 모처럼 아내와 경복궁 나들이에 나섰다. 광화문을 지나 근정문을 거쳐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勤政殿)으로 들어섰다. 근정전은 국가의 중요한 행사를 치른 전각으로 경복궁에서도 가장 크고 웅장한 건축물이다.

왕이 신하들의 하례를 받고 왕과 왕비의 즉위식이 열리기도 하는 등 드라마와 사극에서 자주 봐왔던 가장 친숙한 공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근정전은 경복궁의 상징적 장소인 만큼 다른 전각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건축구조를 지니고 있다.

조선의 전궁은 건물을 받치는 넓은 단인 월대(月臺) 위에 세워져 있는데 근정전의 월대는 유일하게 상하 이중으로 이뤄져 있다. 이중월대는 미학적으로 더욱 웅장하고 당당한 모습을 자아내지만 실은 국가의 통치체계를 상징하는 심오한 뜻이 담겨 있다.

아래 월대에는 십이지간 조각상이, 윗 월대에는 방위의 상징인 주작·현무·청룡·백호 ‘사방위신’이 호위하듯 세워져 있다. 십이지간은 시간을, 사방위신은 공간을 나타낸다. 곧 왕이 시간과 공간을 모두 관장하는 절대적 존재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오직 근정전에만 존재하는 이중월대이지만 조선 왕이 시간과 공간을 오롯이 지배했던 것은 아니다. 자주독립국을 뜻하는 건원칭제(建元稱帝), 즉 시간을 정하고 황제라 칭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중국의 천자만이 할 수 있었다.



이처럼 고대로부터 근대에서의 시간이 노예제와 부역처럼 누군가의 시간을 통제하는 권력으로서의 시간의 시대였다면 산업사회의 시간은 생산성의 효율을 위한 ‘자본 시간’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시간은 돈이다’라는 말처럼 시간은 희소한 자원과 기회비용으로 여겨졌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평등하게 주어지되 자본으로서의 값어치는 같지 않았다.

이런 노동집약적 시대에는 시간을 아끼는 것이 덕목이었으나 선진국, 풍요의 시대로 갈수록 ‘시간을 잘 보내는 것’이 중요한 가치가 된다. 우리도 주 52시간 근무제가 본격 시행되며 근로시간 단축을 통한 삶의 질 향상이 새로운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른바 ‘여가시간’의 시대가 활짝 열리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지니는 가치의 변화를 반영하듯 요즘 쇼핑몰들은 “상품이 아니라 시간을 판다”고 한다. 유통 업계의 마케팅 전략이 고객의 지갑을 열게 하는 월렛셰어(wallet share)에서 오랜 시간 머무르게 하는 타임셰어(timet share)로 바뀌고 있다. 최근 쇼핑몰들이 ‘본업’인 팔 거리보다 놀 거리에 더 치중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는 “소비한 돈은 다시 벌 수 있지만 소비한 시간은 다시 건질 수 없다”고 했다. 이처럼 중요한 게 시간이다. 더불어 시간은 사회와 문화, 개인적 삶의 핵심체계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인류는 처음으로 스스로의 시간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시간의 민주주의’를 맞닥뜨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랜 유통업 종사자로서 “시간을 판다”는 말이 지니는 무게감을 더욱 진지하게 고민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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