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로운 칼끝을 겨누며 맹렬하게 칼싸움을 이어가던 한 배우가 바닥에 널브러진다. 대본에선 칼싸움을 이어가야 하지만 칼은 손잡이만 남고 부러진지 오래. 다시 몸을 가눈 배우는 날카로운 장검을 손에 쥔 듯 상대배우와 능청스러운 연기를 이어간다. 그런데 이번엔 상대배우의 칼이 천장에 꽂히고 2층에서 대기 중이던 다른 배우의 무릎 사이를 관통한다. 배우나 연출이라면 한 번쯤 꿨을 법한 악몽이 2시간의 런닝타임 내내 이어지는 연극 ‘더 플레이 댓 고우즈 롱(The play that goes wrong)’은 제목 그대로 모든 상황이 갈수록 악화하는 한 연극 무대를 비춘다. 당황하는 배우들의 모습이 왠지 모를 카타르시스를 남기는 이 장면에 이미 30여개국 관객들이 속수무책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세종문화회관 개관 40주년, 신시컴퍼니 창립 30주년을 맞아 공동기획한 이 작품은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 최고의 화제작으로 꼽힌 희극. 2012년 드라마스쿨 학생들이 영국 런던의 자그마한 술집 2층 극장을 빌려 단 4명의 관객만을 앞에 두고 시작한 연극은 입소문으로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와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까지 상륙했고 지금까지 수출국만 37개국에 이른다. 또 올리비에상, 토니어워즈 등 전세계 대표 공연 시상식에서 11차례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성공적인 이력에 비해 내용은 단순하다. 콘리 대학 드라마 연구회 회원들은 미스터리 장르 연극 ‘해버샴 저택의 살인사건’을 공연하는데 극이 진행될수록 문제가 커진다는 설정. 문이 열리지 않거나 벽에서 소품이 떨어지고 같은 장면을 반복하는가 하면 급기야 음향장비와 조명마저 고장 나버린다. 관객 입장에선 재앙 수준의 공연이지만 배우들은 공연을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보통 서양식 유머 코드를 내세운 작품 대다수가 국내에선 고배를 마시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최근 고양어울림누리 연습실에서 만난 션 터너 연출은 한국 관객들 역시 이 작품을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는 “우리 모두 최선을 다했지만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배우들의 노력이 웃기면서 공감할 수밖에 없다”며 “도덕적 메시지도 정치적인 주제의식도 없는 이 작품은 말 그대로 즐거운 시간만 선사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국경도 문화적 차이도 뛰어넘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로버트 역의 호산, 조나단 역의 선재 등 100대 1의 경쟁을 뚫고 선발된 11명의 배우들 면면은 연극팬들에겐 다소 낯설다. 주역으로는 다소 낯선 배우들이 다수 캐스팅된 배경에는 독특한 오디션 방식이 있다. 터너 연출은 “오디션에 응시한 배우들과 하루 동안 다양한 게임을 하며 워크숍을 진행했고 그 과정에서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고 협력할 줄 아는 배우들을 추려냈다”며 “세계 어디를 가든 스타 배우에 의존하지 않고 매번 성공했다는 점은 우리의 자부심”이라고 귀띔했다.
연습 방식도 독특했다. 대부분의 프로덕션이 연습 기간에는 구조물만 설치하고 연습을 진행하는데 반해 터너 연출은 반드시 실제 무대를 설치해두고 배우들이 전체 연습을 소화해야 한다고 고집했다고 한다. 터너 연출은 “이 연극에서 무대는 제3의 배우라고 할 정도로 중요하다”며 “지난해 토니어워즈에서 최우수 무대 디자인상을 수상한 것은 그 만큼 우리 무대가 배우로서 완벽한 연기를 펼쳤다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내년 1월5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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