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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윤석의 영화 속 그곳] 김태리가 울고 웃던 골목 슈퍼…민주화 숨결 남아있었다

(2)'1987' 연희네 슈퍼

학생운동 뜻없던 풋풋한 스무살 소녀의

심경 변화 담아낸 영화 '1987' 속 장소

과자·장난감 등 각종 소품 그대로 전시

안쪽엔 소녀 감성 '연희의 방'도 꾸며놔

영화 ‘1987’의 스틸컷(가운데 사진)과 촬영지인 ‘연희네 슈퍼’.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어요?”

갓 스무 살의 풋풋한 소녀는 학생운동을 하는 동아리에 들어오라는 선배의 권유에 이렇게 냉소한다. 처음 나가보는 미팅에 설레고 방구석을 연예인 사진으로 도배한 소녀는 이제 막 대학에 들어온 새내기다. 머리 아픈 세상일보다 가슴 두근대는 청춘 사업에 관심이 가는 나이다. 그런데 이 소녀, 시곗바늘이 골백번 돌아도 좀체 아물지 않는 상처를 품고 있다. 밀린 월급을 주지 않는 사장에 맞서 단체행동을 준비하던 아빠는 홧김에 술을 퍼마시고 교통사고로 죽었다. 교도소 교도관인 외삼촌은 노조 설립을 시도하다가 파면된 후 가까스로 일자리를 되찾았다. ‘까불면 다친다’는 처세의 기본 명제를 너무 일찍 터득했기 때문일까. 소녀는 연대의 손길이 간절한 선배를 뿌리치며 차갑게 덧붙인다. “가족들 생각은 안 해요? 꿈꾸지 말고 정신 차리세요.”

30여년 전 뜨거웠던 6월 항쟁의 기억을 그린 영화 ‘1987(2017년)’의 한 대목이다. 겁많은 소녀 연희(김태리)와 세상을 바꾸고 싶은 선배 이한열(강동원)은 노을이 지는 슈퍼 앞 평상에서 쓸쓸한 대화를 나눴다. 이 장면은 전남 목포에서 촬영됐는데 당시 배경으로 등장한 ‘연희네 슈퍼’는 영화에 대한 관객의 사랑에 보답하듯 관광지로 변모해 한창 여행객을 맞고 있다. 장준환 감독이 연출한 ‘1987’은 상업영화로는 다소 모험적인 서사 구조를 지닌다. 관객의 확실한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주인공을 한두 명 내세우는 대신 검사·언론인·대학생 등 여러 인물이 이어달리기하듯 치고 빠진다. 영화 앞뒤에 배치된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자칫 혼란스러울 수 있는 이야기의 뼈대를 잡아준다.

‘연희네 슈퍼’를 찾은 방문객들이 슈퍼 앞에 전시된 택시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연희네 슈퍼’ 내부에 꾸며놓은 연희의 방.


‘연희네 슈퍼’를 찾은 방문객이 내부에 전시된 소품을 구경하고 있다.


연희네 슈퍼는 이런 ‘1987’의 후반부를 책임지는 공간이다. 목포시 해안로 127번길에 자리한 이곳은 골목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큼지막한 안내판이 보여 쉽게 찾을 수 있다. 슈퍼 안으로 들어가면 방문객들에게 판매는 하지 않는 과자와 장난감, 각종 생필품이 펼쳐져 있고 안쪽에는 소녀 감성이 엿보이는 연희의 방이 자리한다. 오래된 참고서와 나무 책상, 빛바랜 사진들이 여행객들을 추억 속으로 안내한다. 영화에서도 슈퍼와 연희의 방은 바로 이어지는 공간으로 설정돼 있는데 실제로 방 장면은 다른 곳에서 촬영됐다. 하지만 ‘1987’에 나오는 장소와 거의 유사하게 꾸며놓은 덕분에 외삼촌(유해진)에게 카세트 선물을 받고 까르르 넘어가던 김태리의 웃음소리가 귓전에 울리듯 생생하다. 교도관으로 복직한 후 운동권 인사와 내통한 혐의로 경찰의 손에 끌려가는 외삼촌을 황망하게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도 선하게 그려진다. 단기간에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한 곳답게 슈퍼 한구석에 놓인 방명록에는 다녀간 이들이 남긴 흐뭇한 후기가 차고 넘친다. 좁은 슈퍼만 구경하고 발걸음을 돌리기 아쉽다면 바로 맞은편에 있는 ‘의상 대여점’으로 가면 된다. 1인당 3,000원만 내면 옛날 교복을 빌려 입고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하며 오래도록 간직할 사진 한 장을 남길 수 있다. 연희네 슈퍼는 월~목요일은 오전10시부터 오후5시까지, 금~일요일은 오전9시부터 오후6시까지 운영된다.

마음의 문을 걸어잠근 연희는 이 슈퍼에서 선배를 매몰차게 돌려세웠는데, 공교롭게도 그녀가 새롭게 변화하고 다시 태어나는 공간도 바로 이 장소다. 눈앞에서 경찰이 외삼촌을 붙잡아가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던 연희는 어느 날 슈퍼로 배달된 신문을 집어든다. 신문 한가운데 박힌 사진에서 선배가 최루탄을 맞고 피 흘리며 쓰러지고 있다. 맥없이 졸다가 찬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쓴 사람처럼 연희는 정신이 번쩍 깬다. 마침내 알을 깨고 나온 연희는 좁은 골목을 벗어나 달리고 또 달린다. 그 길의 끝에 시원하게 트인 광장이 기다린다. 강물이 모여 바다를 이루듯 각자의 자리를 박차고 나온 동지들이 있기에 연희는 이제 외롭지 않다. 주눅이 들어 잔뜩 웅크리고만 있던 소녀가 밤하늘의 별처럼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의 함성에 힘을 보탠다. 그제야 감독은 할 얘기를 마쳤다는 듯 작품의 제목 ‘1987’을 스크린 한복판에 띄우고 엔딩 크레디트(마지막 자막)를 올린다. 영화 ‘1987’은 이렇게 한두 사람의 영웅에게 헌사를 바치는 대신 슈퍼에서 물건을 팔고,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공장에서 기계를 돌리고, 사무실에서 밤낮없이 일하던 우리 모두의 가슴에 훈장을 달아준다. /글·사진(목포)=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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