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굳은 표정으로 돌아서면서 북미 관계는 다시 한 번 냉각기로 접어들게 됐다. 지난해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 이후 남북 관계가 해빙 무드를 보이면서 미국과 북한도 적대관계 청산 등 새로운 길로 들어서는 듯했다. 하지만 이번 하노이회담에서 어떤 합의도 이뤄내지 못하면서 북미 사이는 다시 멀어지게 됐다. 특히 두 정상이 그간 상호 신뢰를 앞세워 ‘톱다운’ 방식으로 북미 관계를 끌어왔던 터라 다시 관계 개선을 모색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게 됐다.
북미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은 오래전 김일성 전 주석은 물론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절에도 시도됐다. 하지만 서로 믿지 못했던 탓에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6·25전쟁 이후 대립과 갈등의 역사를 반복해오던 북미 양국은 지난 1990년 들어 북핵 문제를 둘러싸고 여러 차례 협상에 나섰지만 결국 불신의 골짜기를 넘지 못한 채 반세기 이상을 보내왔다. 정전 후 견원지간이던 북미 간 접촉이 본격적으로 글로벌 외교의 전면에 등장한 장면은 1994년 6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김 주석의 회동이다. 19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한 데 대해 빌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 영변 핵시설 폭격을 검토하자 카터 전 대통령은 북한으로 날아가 김 주석을 만났다. 김 주석은 미국이 경수로를 제공해주면 핵 프로그램을 동결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한 달 뒤 김 주석은 사망했고 같은 해 10월 제네바 공식 회담에서 북미 합의가 도출되면서 1차 북핵 위기가 마무리됐다.
두 번째 협상은 북한이 1998년 8월 첫 장거리탄도미사일인 대포동 1호를 발사하며 촉발한 미사일 위기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진행됐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가던 2000년에는 처음으로 북미정상회담이 추진되기도 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1998년 11월 대북 강경파인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을 대북정책조정관에 임명했다. 이듬해 10월에는 북한이 핵·미사일 개발계획을 전면 중단하도록 유도하고 한반도 냉전을 종식시킨다는 대북 포용정책을 뼈대로 한 보고서를 완성했다. 이후 북미 양국은 2000년 7월 말 태국 방콕 아시아지역안보포럼(ARF)에서 첫 북미 외교장관회담을 개최한 데 이어 조명록 북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그해 10월10일 미국을 방문해 백악관에서 클린턴 전 대통령과 만나는 등 역사적 화해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국무장관도 10월23일부터 2박3일간 평양을 답방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북미정상회담에 관해 논의했다.
하지만 미국 대선 이후 분위기는 확연하게 달라졌다. 2000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의 조지 W 부시가 당선되자 클린턴 전 대통령은 평양 방문계획을 돌연 취소했다. 취임 후 2001년 9·11테러를 겪은 부시 전 대통령은 2002년 1월 국정연설에서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으며 북한은 2003년 1월 핵확산금지조약을 전격 탈퇴했다. 후임인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도 ‘전략적 인내’를 내세우며 북한과 직접적인 대화에 나서지 않아 대화 교착 상태가 이어져왔다. 트럼프 대통령 집권 후에도 양측은 ‘핵 버튼’ 경쟁을 거듭 하며 적대감을 키웠다. 하지만 김정은 위원장이 제재 압박에 밀려 대화에 나서면서 북미 관계는 변화의 기회를 잡았고 지난해 북미 정상이 사상 처음으로 손을 잡는 장면까지 연출할 수 있었다. /하노이=정영현기자 박홍용기자 prodig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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