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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구찬 논설위원의 관점] 경제이슈 빨아들일 블랙홀…정치적 결단·물가·국민공감이 관건

■리디노미네이션 가능할까

2003년 한은 독자 추진하다 좌초

이주열 총재 "이제 논의할 때 됐다"

대외 위상 제고·거래 편의성 장점

물가 자극·사회적 비용은 큰 부담

'정치적 자살골' 평가에 결단 쉽잖아

국면전환 깜짝카드 활용 가능성도







우리나라의 화폐 단위는 지난 1962년 2차 화폐개혁으로 ‘환’에서 ‘원’으로 변경됐다. 당시 새로 찍어낸 지폐는 500·100· 50 ·10 ·5원권 등 5개 종. 그로부터 10년 뒤 5,000원권 지폐가 등장하고 1973년과 1975년 각각 1만원권과 1,000원권이 나왔다. 5만원권을 제외하고 지금 통용되는 지폐의 대부분이 첫선을 보인 시기였다. 반세기 전의 일이다. 그 사이 경제 규모는 놀랄 정도로 커졌다.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1962년보다 4,872배 커졌고 같은 기간 물가는 36배가 올랐다. 원·달러 환율은 9배쯤 올랐다.

원화 지폐에는 이렇듯 수십년간의 인플레이션이 고스란히 농축돼 있다. 화폐 단위 또는 액면가 변경을 의미하는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경제 규모와 물가 수준 등에 비해 원화의 액면가가 너무 높다는 것이다. 서울 아파트 평균 가격인 6억원이면 ‘0’이 8개 붙는다. 미국 돈 기준으로는 50만달러로 5개의 ‘0’이면 된다. 지폐에 ‘0’이 많을수록 후진국 같은 느낌을 준다.

한국은행이 최근 화폐 액면 변경의 필요성을 다시 제기하면서 경제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지난달 중순 국회에서 “리디노미네이션 논의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정치권에서 논의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 발행기관인 한은이 원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한은법을 고쳐야 한다. 가령 화폐 단위를 ‘원’에서 ‘환’으로 고치고 신·구권 교환비율인 환가율을 정해 법률에 담아야 한다. 하지만 정부의 입장은 단호하다. “현재 어떠한 검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획재정부의 공식 입장이다. 논의조차도 조심스럽다는 반응이다. 리디노미네이션은 정부 차원에서 개연성이 있다는 신호를 조금만 주더라도 엄청난 파장과 혼란을 낳기 때문이다. 그만큼 민감하고 휘발성이 큰 사안이다.

학계의 견해는 분분하다. ‘할 때가 됐다’는 적극적 지지론부터 ‘장기 과제로 검토할 만하다’는 소극적 지지론, ‘뜬금없는 소리’라는 반대론까지 다양하다. 한은 출신의 오정근 한국금융ICT융합학회장은 “우리나라 경제 규모에 비해 화폐의 국격이 너무 떨어진다”면서 “인플레이션이 거의 없는 지금이야 말로 결단을 내릴 적기”라고 말했다. 리디노미네이션은 이처럼 대외적 위상을 제고하는 것 외에도 회계 처리와 기장 등 거래의 편의성을 도모할 수 있다. 신·구권의 교환 과정에서 지하경제를 드러내 세수확대를 꾀할 수 있는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박근혜 정부 시절 ‘증세 없는 복지’가 경제 화두로 떠오르자 정치권에서는 화폐개혁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단점도 적지 않다. 물가를 자극할 우려가 크고 부동산 같은 실물 투자 쏠림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사회적 비용도 만만치 않다. 새 화폐주조 비용 외에도 금융권과 기업은 현금인출기(ATM)를 비롯한 기존 기기와 회계 프로그램을 교체해야 한다. 무엇보다 모든 경제 주체들의 불안심리를 자극해 경기마저 위축시킬 수 있다. 이런 이유로 한은이 2003년 리디노미네이션 실행 방안을 마련했지만 정부의 반대로 이듬해 좌초하고 말았다.



리디노미네이션은 득실 여부를 떠나 실제 단행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화폐개혁은 ‘경제판 개헌’에 곧잘 비유된다. 개헌 논의가 시작되면 모든 국정 이슈를 빨아들이듯 리디노미네이션은 경제 이슈의 블랙홀이 될 수밖에 없다. 양준모 연세대 교수는 “리디노미네이션은 장기적인 국민 편익이 예상되지만 단기적인 사회적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면서 “이런 선택은 정치적 자살골이나 다름없다”고 평가했다. 자칫하면 정권 차원의 최대 악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은이 공식 제기한 후 15년째 제자리를 맴도는 연유는 여기에 있다.

박해식 금융연구원 국제금융연구실장은 “논의를 해볼 사안이기는 하지만 시급성이 떨어진다”면서 “국민이 당장 불편을 겪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은이 발동을 걸던 시기에 정부 차원에서 검토했던 전직 고위 관료는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처음에는 관심을 가졌지만 여러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실무진의 의견을 듣고 접었다”면서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커 획기적 계기가 없으면 결단을 내릴 정부는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이어 “정치권이 국면 전환용 깜짝 카드로 동원할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2002년 한은 총재 취임 이후 리디노미네이션 추진을 주도한 박승 중앙대 명예교수는 “부작용 우려는 기우”라며 다른 견해를 내놓는다. 다음은 박 전 총재와의 일문일답.

-다른 경제현안도 많은데 굳이 해야 할 필요가 있나. “안 한다고 해서 당장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해야 한다. 빠를수록 사회적 비용이 적게 든다. 2004년 추진하자 정부 고위층에서 반대를 했다. 경제에 충격을 준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과거와 다르다. 인플레이션 걱정은 이제 없지 않나. 비용이 들지만 반대로 시설 투자와 정보기술(IT) 분야의 일감이 늘어난다. 비용은 경기부양 효과로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다.”

-리스크가 크고 민감한 사안인데. “실패 확률은 없다고 본다. 과거 화폐개혁처럼 예금을 동결하는 것이 아니다. 비밀리에 하는 것도 아니다. 신·구권을 일정 기간 함께 통용한다. ‘우수리 효과’를 걱정하지만 가격 표시를 일정 기간 함께한다면 문제가 안 된다. 이미 한은은 1,000여쪽의 방대한 연구자료가 있다. 세세한 실행방안도 있다. 현재 실정에 맞게 업그레이드하면 순탄하게 진행할 수 있다.”

해외 사례는 어떨까.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한 액면변경은 역설적으로 물가 급등기에 시행하다가는 실패하기 십상이다. 산유국이지만 좌파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리는 베네수엘라가 대표적이다. 베네수엘라는 볼리바르 액면가를 2008년 1,000대1, 지난해 8월 10만대 1로 낮췄지만 연간 200만%에 육박하는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에 나라 경제가 결딴 나버렸다. 재정 긴축·구조조정 같은 경제체질 강화 없이 화폐개혁을 단행하자 되레 화폐 불신을 낳아 인플레의 악순환에 빠진 것이다. 반대로 2005년 무려 100만대 1의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한 터키는 성공 사례로 꼽힌다. 물가 불안 탓에 두 차례 시행을 유보하다 물가가 낮아지는 추세를 확인하고서 결행에 나섰다. 20%가 넘던 소비자물가는 이후 3년 동안 평균 8.9%로 떨어졌다.

화폐개혁을 실행하려면 정치적 결단 외에도 경제적 여건이 뒷받침돼야 한다. 해외사례를 보듯 국내외 경제 안정은 필수다. 신제윤 전 금융위원장은 “디플레이션 수준의 물가 안정이 필요하고 개방 통상국가인 우리나라로서는 원화 강세 기조가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준모 교수는 “과거 두 차례 충격적인 조치의 잔상이 남아 있다”며 “관건은 국민적 공감대를 얼마나 형성하고 사회적 비용을 어떻게 최소화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지적했다. /chan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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