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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윤석의 영화 속 그곳]자유의 언덕에 서면…'시간과 꿈'이 엉클어진다

⑭북촌 지유가오카 핫초메-'자유의 언덕'

시간 통념 부수며 뒤섞인 편지지 따라 전개

기억·사건의 순서로 '사랑의 꿈' 달라져





서울 안국동에 위치한 카페인 ‘지유가오카 핫초메’의 외관.


영화 ‘자유의 언덕’의 스틸 컷.


“이 독창적인 소설미학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하나. 이 소설의 장르는 그래서 그냥 ‘은희경’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지난 2007년 출간된 은희경의 소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를 읽고 이렇게 썼다. 작품의 개성이 너무 독보적인 나머지 그 작품을 이해하는 열쇠는 오직 작가의 이름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한 찬사였다.

한국의 영화감독 가운데 이런 평가가 어울리는 사람을 한 명만 꼽는다면 역시 홍상수일 것이다.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데뷔한 홍상수는 23편의 장편영화를 만드는 동안 단 한 번도 형식 실험에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다. 그는 술과 침대, 남자와 여자를 기본 요소로 깔고 때로는 시간의 흐름을, 때로는 플롯의 구조를 뒤흔들며 관습과 통념을 해체했다. 홍상수의 모든 영화는 어떤 장르가 아니라 ‘홍상수’라는 이름 하나로 수렴된다. 홍상수는 여전히 길 위에 서 있고, 오늘도 한 걸음씩 진화하고 있다.

2014년 작품인 ‘자유의 언덕’ 역시 홍상수의 빛나는 형식 실험을 확인할 수 있는 영화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일본인 모리(가세 료분)는 한때 결혼을 꿈꿨던 여성인 권(서영화분)을 찾아 서울에 온다. 그런데 몸이 좋지 않은 권은 집을 비우고 요양을 떠난 상태다. 모리는 북촌의 한 민박집에 묵으며 며칠 동안 겪은 일을 편지로 써서 권에게 보낸다. 뒤늦게 두툼한 편지를 받아든 권은 계단을 내려오다 실수로 편지지를 모두 떨어뜨린다. 열 장이 훨씬 넘는 편지지는 차례가 뒤엉켰고 한 장은 권이 미처 줍지 못해 빠져버렸다. 흐트러진 순서로 읽어나가는 편지가 곧 관객이 보는 영화의 흐름이다.

작품 제목에 영감 준 촬영지 북촌 카페



아기자기한 소품·벚꽃 어우러져 몽환적



서울 종로구 북촌에 있는 카페인 ‘지유가오카 핫초메(삼청점)’는 영화의 주요 촬영지이자 작품 제목에 직접적인 영감을 던져준 곳이다. 카페 안으로 들어가면 한쪽 벽면에 전시된 영화 포스터가 보이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인테리어도 눈길을 끈다. 음식점과 민박집 등 인근에 자리한 ‘자유의 언덕’ 촬영지를 일목요연하게 소개한 전시물은 영화를 추억하는 방문객에게 특히 요긴하다. 카페에 앉으면 마침내 도래한 봄날을 축복하듯 활짝 핀 분홍 벚꽃도 창문 너머로 감상할 수 있다. ‘지유가오카 핫초메’는 현재 20여개 지점을 보유한 국내 프랜차이즈 카페로 2010년 4월 서울 삼성동에 처음 문을 열었다. ‘자유의 언덕’을 뜻하는 지유가오카는 일본 도쿄의 유명한 카페거리 이름이며 핫초메는 ‘8가(街)’의 일본식 발음이다. 현지에서 8이 행운의 숫자를 상징한다는 데서 착안한 작명이다.

영화에서 모리는 북촌을 이리저리 헤매다가 우연히 이 카페를 찾는다. 카페 사장인 영선(문소리분)과 안면을 트고 나서 얼마 후 모리는 영선의 잃어버린 개를 찾아준 인연으로 술을 곁들인 저녁 식사를 대접받는다. 영선은 단정하고 수수하면서도 맑은 기운이 있는 모리가 마음에 드는 눈치다. 이후 며칠의 시간이 흐르고 권은 돌아올 기미가 없는데 영선이 구애의 손짓을 계속하니 모리는 그만 자제력을 잃고 영선과 잠자리를 갖고 만다.

카페 내부의 벽면에 영화 ‘자유의 언덕’ 포스터를 비롯한 다양한 전시물이 걸려 있다.


‘자유의 언덕’은 보고 나면 관객들이 저마다 다른 감상문을 제출할 법한 영화다. ‘뒤섞인 편지’라는 형식만큼 모호함을 키우는 것은 권이 모리의 편지를 모두 읽은 다음 나오는 마지막 세 장면이다. 북촌 카페에서 편지를 읽고 나온 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민박집에서 모리와 해후한다. 그들은 곧이어 어슴푸레한 새벽 기운을 느끼며 북촌 언덕길을 오른다. 화면 위로는 “다음날 우린 함께 일본으로 떠났다. 그 후에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았다”는 다소 뜬금없는 내레이션이 흐른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이 밝아오면 다시 민박집이다. 영선과 처음 술을 먹은 다음날 아침, 모리가 민박집 앞마당의 테이블에 엎어져 잠들어 있다. 곧 방문이 열리면 숙취에 절은 영선이 부스스한 얼굴로 나온다. 두 사람은 ‘모닝 담배’를 같이 피운 뒤 인사를 하고 헤어진다.

도대체 이건 뭔가. 혹시 권과 모리가 조우한 뒤 언덕길을 걷는 앞의 두 장면은 모리의 꿈이 아니었을까. 이 꿈에서 깨어난 모리의 모습이 담긴 세 번째 장면은 혹시 권이 빠트린 한 장의 편지지에 적힌 내용은 아니었을까. 모리는 이 한 장의 편지지에 영선의 유혹에 휘말리는 대신 따로 잠을 청한 자신의 모습을 자랑스레 늘어놓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자유의 언덕’의 에필로그는 한 인간이 사랑을 지키기 위해 욕망을 이긴 아름다운 순간을 담은 셈이 된다. 관객은 확인한 이 순간을 권은 끝내 알지 못한다는 ‘정보의 격차’ 때문에 영화의 슬픔은 한층 깊어진다. /글·사진=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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