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쉽게도 ‘혹시나’가 ‘역시나’가 됐다. 해방 후 70여년이라는 오랜 기간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전혀 변하지 않는 북한을 지켜본 필자도 이번에는 다를 수 있겠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김정은이 아직 젊고 어린 시절 제네바에서 유학하면서 서구 민주주의 문화를 체험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평창동계올림픽을 참관해 한국의 발전상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김여정이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데는 핵을 포기하고 개혁과 개방을 하게 되면 현재와 같은 독재정권을 유지할 수 없다고 김정은과 북한의 권력층이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심각한 경제난으로 북한의 재래식 무기가 보잘것없는 상황에서 핵을 포기하게 되면 북한은 한미연합군의 막강한 군사력 앞에서 무기력한 상태가 되는데 북한이 이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각을 했을 수 있다. 또 중국이나 베트남과 같이 경제 분야에서의 개혁과 개방정책을 추진하기 어려운 것도 이 과정에서 야기될 자유화의 물결을 막아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특히 한국과 같이 북한보다 인구도 많고 경제력이 월등히 우월한 경쟁자가 있는 상황에서 북한이 중국이나 베트남과 같은 개혁·개방조치를 취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럼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중요한 것은 인내심을 갖고 북한의 변화를 기다리는 것이다. 북한이 스스로 핵을 포기하고 경제를 개방하는 전략적 선택을 하지 않는 한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경제제재 조치가 해제되지 않을 것이고 이런 상황에서는 남북 간 긴밀한 협력 역시 이뤄지기 어렵다. 미국은 북한이 경제제재로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시간이 자신의 편이라는 인식하에 느긋한 입장을 견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성급한 대북지원은 한미동맹을 훼손시키고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을 자초할 수 있기 때문에 당분간은 인내심을 갖고 신중하게 대북협력을 추진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한국의 대북지원을 핵과 개혁·개방과 관련한 북한의 노력과 연계하는 원칙을 확고히 세우고 이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독일의 경우 서독은 동독의 개방조치와 연계해 경제지원을 추진했고 이는 결국 통일로 이어졌다. 비록 우리가 독일과 같이 흡수통일을 지향하지 않는다고 해도 핵과 개혁·개방 분야에서 북한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데 경제적 지원을 추진한다면 이는 북한의 핵 개발과 폐쇄적 통치를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
대북정책에 있어 한국이 유념해야 할 또 하나의 원칙은 대북정책이 한미동맹의 틀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북한은 한국전쟁을 일으키고 KAL기 격추, 아웅산 사태 등 각종 군사적 도발을 한 당사자이다. 또 아직도 핵과 미사일·화학무기 등 막강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군사력의 일차적 공격대상이 한국이라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한미동맹은 이러한 북한의 군사적 도발 가능성에 대비한 한국이 선택한 가장 유효한 대응전략이다. 따라서 한국의 대북지원 과정에서 한미 간의 의견 차이로 동맹관계 약화가 초래되는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원칙을 지키면서도 식량·의료 등 인도적 차원의 대북지원은 핵 문제와 관계없이 추진해야 할 것이다. 특히 핵에 관한 미북 간 이견으로 경제제재가 장기화되는 경우 북한 주민들의 경제적 고통은 심각한 상태에 이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식량과 의료 부문에서의 지원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질 것이다. 아프리카 빈민과 전 세계 분쟁지역의 난민들도 적극적으로 돕고 있는 한국이 심각한 생활고를 겪고 있는 북한 동포를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경제적 지원은 핵과 관련된 북한의 조치에 연동시키되 인도적 지원은 정치와 분리해 적용하는 새로운 관행이 하루속히 정착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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