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활로를 모색해온 중국의 반도체 굴기가 또 다른 암초를 만났다. 최근 중국인이 관여된 네덜란드 장비업체 ASML의 기술 유출 사건을 계기로 중국업체에 대한 유럽의 경계 심리가 부쩍 높아진 때문이다. 강력한 후발 경쟁자로 꼽히는 중국이 미국에 이어 유럽에서도 입지가 위축될 경우 삼성전자,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한 메모리 과점 구조가 더 굳어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4일 외신과 업계 등에 따르면 유럽이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이 냉정해지고 있다. 이전만 해도 비즈니스 기회 선점을 최고 우선순위에 뒀다면 이제는 기술 유출 등에도 민감한 모습이다. 그간 유럽은 미국의 노골적인 중국 견제와는 일정 거리를 둬 왔다. 하지만 최근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보안상 이유로 영국이 화웨이 핵심부품을 사용하지 않기로 한 데 이어 2016년 로봇 기업 ‘쿠카’를 중국 메이디그룹에 넘긴 독일도 쿠카의 대량 감원 소식에 여론이 싸늘하다. 유럽의 이런 흐름에 기름을 부은 게 바로 ASML 기술 유출 사건이다. ASML은 “중국 출신 전 직원들이 소프트웨어를 불법 탈취해 미국에 ‘XTAL’이란 회사를 세웠다”며 XTAL과 소송 중에 있다. IT 전문매체 지디넷은 “‘중국 정부가 이번 기술 유출에 개입하지는 않았다’는 게 ASML의 공식 입장이지만 이 사건을 바라보는 유럽은 보다 현실적으로 바뀌고 있다”고 진단했다. 앞서 지난 연말 모바일 D램 업체 이노트론 등 중국 반도체 기업의 경영진들은 ASML 등 유럽의 장비 업체와 연구소를 잇따라 접촉했다. 서버 D램 업체 푸젠진화가 미국 장비 업체의 수출 금지로 궤멸적 타격을 받으면서 유럽으로 협력의 외연을 넓혀야 한다는 절박감에 따른 행보였다. 그런데 이번 일로 나쁜 영향이 불가피할 것이란 관측이다. ASML은 파운드리(위탁생산) 업계를 주름잡는 대만 TSMC, 삼성전자에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를 독점 납품하는 갑 중의 갑이다. 아직 30나노급 제품도 양산하지 못한 이노트론 등 중국 업체와는 비즈니스로 얽힌 것은 없다. 하지만 중국 기업 입장에서는 미국과의 관계 악화로 핀치로 내몰린 마당에 유럽에서조차 견제에 시달릴 경우 운신의 폭이 크게 쪼그라들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 중국은 지난해 넥스페리아(네덜란드), 랭상스(프랑스)를 인수하는 등 유럽 반도체 기업으로 눈을 돌려왔다. 자칫 이번 사달이 이미 타격을 받을 대로 받은 반도체 굴기에 또 다른 악재가 될 수도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기술 탈취 등과 관련해 중국기업에 대한 견제 심리가 미국을 넘어 유럽으로 번지는 상황”이라며 “반도체 후발 주자인 중국으로서는 이래저래 어려운 지경으로 몰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상훈기자 shle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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