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등기업과 일류기업은 조금 다르다. 전자가 매출이나 시장 점유율 같은 수치적 성과에 국한된 기업이라면, 후자는 여기에 더해 사회적 영향력과 인지도·시장 내 파급력 등 무형의 가치도 함께 내포한 기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대한민국 대표기업인 삼성전자는 일등기업을 넘어 글로벌 초일류기업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올해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이 선정한 ‘2019년 세계 50대 혁신기업 순위’에서 삼성전자는 구글, 아마존, 애플, 마이크로소프트에 이어 5위에 올랐다.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 굴지의 글로벌 기업들과 때론 동지로, 혹은 적으로 협력과 건전한 경쟁을 펼치고 있다.
국내에선 사실상 적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출, 영업이익 등 실적 측면에서 삼성전자는 모든 산업군을 통틀어 압도적인 면모를 자랑한다. 포춘코리아와 서울대 경영연구소가 9년 째 선정·발표한 ‘포춘코리아 500대 기업’ 순위에서도 삼성전자는 단 한차례도 1등 자리를 빼앗긴 적이 없다. 적어도 향후 몇 년간은 지금의 흐름이 유지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자연스레 삼성전자, 나아가 삼성그룹 전체의 미래를 이끌어갈 리더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도 관심이 모아진다. 이재용 부회장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재계의 톱 리더다. 혹자는 그를 두고 ‘경제 대통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만큼 삼성이라는 회사가 대한민국 경제에서 가진 상징성이 크다는 반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재용 부회장은 어떤 사람일까? 그리고 그는 이병철 선대회장, 이건희 회장이 그러했듯 삼성의 성장을 이끌며 밝은 미래를 써내려갈 수 있을까? 포춘코리아가 대한민국 산업계의 실질적 리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집중 조명해봤다.
지난 2015년, 대한민국은 중동호흡기 증후군, 이른바 ‘메르스 사태’로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당시 메르스는 사실상 국가 방역시스템을 완전히 초토화시킨 일대 사건이었다. 지금은 국가방역체제 개편, 조기 경보 확대 등 사전 예방 시스템이 비교적 잘 갖춰져 있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다. 전에 없던 메르스 감염 공포는 대한민국 사회 전반에 자리 잡았고, 국민들은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다. 특히 몇몇 기관과 병원이 메르스 감염과 확산을 막지 못했다는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언론과 국민들로부터 비난과 사회적 지탄을 받았고, 그곳의 수장들은 국민들 앞에 고개 숙여 사과를 해야 했다.
2015년 6월 23일, 메르스 감염과 확산을 막지 못했다는 비난에 직면했던 삼성서울병원이 긴급기자회견을 연다고 알려왔다. 사실 대다수 언론에선 기자회견에 나설 발표자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병원의 총 책임자인 병원장의 등장을 유력시한 가운데, 삼성서울병원이 내놓을 향후 대책과 사과의 수위에 좀 더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긴급기자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낸 발표자는 다름 아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었다. 당시 그는 ‘삼성전자 부회장’이 아닌 ‘삼성생명공익재단 이사장’의 직함으로 기자회견에 나섰다.
◆전면에 등장하다
이재용 ‘이사장’은 우선 고개를 숙여 사죄의 뜻을 밝혔다. 그리고 재발 방지와 함께 병원의 대대적인 혁신을 약속했다. 그는 “메르스 감염과 확산을 막지 못해 국민들에게 큰 고통과 걱정을 안겨 드린 점 고개 숙여 사죄한다”며 “환자와 가족이 겪고 있는 불안과 고통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는 만큼, 끝까지 환자들을 책임지고 치료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언론, 그리고 업계에선 이재용 부회장의 당시 기자회견이 사과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해석했다. 일단 사과문 자체도 굉장히 설득력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는 이재용 부회장의 아버지인 이건희 회장도 1년 가까이 투병생활을 이어가던 시점이었다. ‘환자와 가족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다’는 말은 바로 아버지의 투병생활을 지켜보는 아들의 입장을 언급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또 국민들과 환자들이 진정 듣고자 했던 재발방지 약속과 방안을 설득력 있게 언급했던 점도 높은 평가를 받은 이유 중 하나였다. 당시 이재용 회장은 ‘음압 병실 추가 설치’, ‘백신 및 치료제 개발과 관련 투자’ 등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안을 언급하며 병원의 혁신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무엇보다 업계에선 이재용 부회장의 등장 자체가 큰 의미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지난 2012년 삼성전자 부회장으로 승진한 이후 그는 가족 행사, 삼성라이온즈 야구 경기 관람 등 극히 제한적인 외부활동만을 이어 왔다. 그랬던 그가 언론과 국민 앞에 모습을 드러낸 사실상의 첫 공식 자리가 바로 당시 기자회견이었다.
일각에선 당시 삼성전자에 좋지 못한 상황과 맞물려 이재용 부회장이 일종의 ‘구원투수’로서 전면에 등장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나오기도 했다. 재계 관계자 A 씨는 말한다. “당시 삼성전자의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우선 야심차게 내놨던 스마트폰 갤럭시S6가 기대만큼의 호평을 받지 못했어요. 판매도 이전 시리즈에 비해 부진했죠. 또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과 관련해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제동을 걸기도 했습니다. 당시 삼성에선 합병의 이유로 해외 인프라 확충 같은 경영전략을 언급했지만, 사실상 이재용 부회장의 승계가 더 큰 이유였음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었죠. 이처럼 이중고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이재용 부회장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 사과문을 발표한 건, 사과 이상의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국민의 삶과 직접 연관돼있는 메르스 사태에 대해 진심어린 사과를 한다면, 따가운 시선과 부정적 이미지 탈피에 긍정적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본거죠. 결론적으로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적절한 타이밍에 등장해 잘못을 인정하고, 진정어린 사과를 하는 모습에 그와 삼성의 이미지도 덩달아 좋아지는 효과를 얻었으니까요. ‘사과하는 사람이 패자가 아니라 사과를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패자다’라는 속설이 현실 속에서 증명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삼성가의 ‘대국민 사과’는 이재용 부회장만이 보여준 전략적 선택은 아니었다. 이건희 회장도 지난 2006년 소위 ‘삼성 X파일’ 사건, 2008년 특검의 삼성그룹 수사 등 여론이 악화할 때마다 직접 기자회견을 열고 머리 숙여 사과했다. 특히 회장직 사임(2008년), 사재 8,000억 원 사회 환원(2006년) 등 실질적인 후속조치를 통해 위기를 정면돌파하기도 했다. 이병철 선대회장 역시 1966년 사카린 밀수사건이 불거지자 대국민 사과와 함께 ‘한시적’으로 총수 자리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이재용 부회장의 당시 기자회견 때문이었을까. 현재 삼성서울병원은 국내에서 가장 완벽한 응급시설과 감염병 대응 체계를 갖춘 병원으로 탈바꿈했다. 우선 ‘발열호흡기진료소’를 신설해 감염 병이 의심되는 환자들은 우선 그곳에서 선별진단을 받은 후 일반 응급실로 들어갈 수 있도록 조치했다. 또 메르스 발발 1년 후인 2016년 5월 중환자실 2개, 일반병실 6개로 구성된 음압격리병동을 개소하고, 감염병 환자의 철저한 격리와 집중치료 환경을 조성했다.
특히 공항 검역소에서 걸러내지 못한 메르스 환자를 조기에 발견, 재빠른 격리와 치료로 메르스 감염을 막는 등의 성과를 내며 메르스 확산 방지의 1등 공신 역할을 톡톡히 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재용 부회장의 첫 공식 석상 등장은 여러모로 삼성과 이 부회장 본인에게 큰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아이러니한 점은 그가 삼성의 수장으로서 처음 공식 석상에 나타난 기자회견 당일이 그의 47번째 생일이었다는 부분이다(이재용 부회장의 프로필 상 생일은 1968년 6월 23일이다). 그는 기자회견을 마친 후 조용히 삼성서울병원에 다시 들러 현장을 둘러본 뒤, 잠시 미뤄뒀던 미국 출장길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여러모로 그의 47번째 생일은 본인에게도, 그리고 삼성의 80여 년 역사에서도 기억될만한 중요한 하루였다.
◆금수저 3세 경영인? 과소평가된 능력
이재용 부회장은 시쳇말로 ‘금수저’다. 그것도 도금된 금수저가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가장 빛나고 화려한 순도 100% 금으로 만들어진 금수저다. 그렇다고 소위 잘나가는 대한민국 상위 1%에게 부러움이나 질투의 대상은 아니다. 대한민국 1%에게도 이재용 부회장과 삼성은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선 안 될 부분이 있다. 그가 태생적으로 금수저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리더로서의 자질이나 능력, 성과까지 금수저로 치부하고 폄하할 수는 없다. 이재용 부회장은 꽤 오래전부터 착실하게 경영수업을 받아왔다. 많은 형제들 중에 후계자를 선택해야 했던 이병철 선대회장과는 달리, 이건희 회장은 장남 이재용 외에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사실상 후계자로 낙점된 이재용 부회장은 학창시절부터 사실상 ‘삼성의 경영자’가 되기 위한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다름 아닌 ‘할아버지’ 이병철 선대회장이었다. 이재용 부회장은 오래전부터 사석에서 자신의 할어버지에 대해 ‘자신에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스승이자 존경받아 마땅한 경영자의 롤모델’이라 말해왔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대학 진학을 앞두고 전공을 고민하던 이 부회장은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선택했다. ‘경영은 외국에 나가서 공부해도 충분하지만, 인간과 문화를 이해하는 경영자가 되기 위해선 인문학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는 할아버지의 조언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이 부회장은 아버지인 이건희 회장과 비슷한 코스를 밟아나갔다. 1991년 공채 32기로 삼성전자에 입사한 이재용 부회장은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본격적인 경영자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일본 게이오대학을 거쳐 약 5년 여간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 스쿨과 비즈니스 스쿨에서 공부를 했다. 그는 미국 생활 중 제네럴 일렉트릭(GE)를 포함해 미국 굴지의 기업 회장들을 직접 만나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기도 했다. 이 역시 삼성에서 기획한 경영수업의 일환이었다. 이재용 부회장은 이후 2001년 삼성으로 복귀해 착실히 경력을 쌓아나갔다. 삼성전자 경영기획팀 상무를 시작으로 전무, 최고운영책임자(CSO), 사장을 거쳐 지난 2012년 삼성전자 부회장으로 승진을 했다.
후계자 수업은 체계적이면서도 엄격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옥석을 가려내려 했던 이병철 선대회장과는 달리, 이건희 회장은 일찌감치 안정적인 자리를 아들인 이재용 부회장에게 제공하며 오롯이 후계자 수업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때론 이러한 환경이 이재용 부회장에겐 오히려 부담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할아버지, 그것을 발전시킨 아버지와는 달리 자신이 맞닥뜨린 삼성은 이미 일등기업의 반열에 올라있는 상태였다. 선대에서 쌓아올린 탑을 자신이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없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중압감 속에서도 그는 후계자로서의 교육을 성실히 받았다. 특히 이건희 회장이 언급했던 3가지 주문은 착실히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알려져있다. 당시 이건희 회장이 주문한 철칙은 ▲주말마다 임원들과 운동하기 ▲주요 고위임원들에 대해 꼼꼼히 기억하기 ▲삼성전자의 모든 해외법인을 돌아보기 등이었다.
이러한 아버지의 주문은 아직까지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 스타일에 그대로 녹아있다. 실제로 그는 일년 중 상당시간을 해외에서 보낼 정도로 글로벌 사업에 큰 관심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그가 후계자 수업을 받으면서 증명했던 ‘성과’에 대해선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그가 삼성전자 사장에 취임 했을 때도, 삼성전자 부회장으로서 사실상 경영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보여줬던 혁신의 삼성을 과연 이어갈 수 있을지에 대해 찬반이 엇갈렸다.
그러나 기자가 만난 대부분의 삼성 전문가들운 이재용 부회장의 능력을 결코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고 입장이었다. 이와 관련해 기자가 만난 한 전직 삼성그룹 관계자는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소위 ‘경영세습’, ‘가족경영’에 대한 세간의 비난에 정면으로 반하는 내용이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건희 회장이 아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더군요. 이재용 부회장에게 단지 ‘아들’이라는 이유로 후계자 자리를 주는 건 부의 세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거였죠. 그런데 아무도 ‘이재용이 후계자가 돼서는 안 되는 이유’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내지 못했습니다. 아직 성과를 내본 적이 없다는 게 이유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이건희 회장이나 이병철 선대회장 역시 무수한 실패를 반복하며 성장해왔으니 그 얘기는 설득력은 떨어졌죠. 중요한 건 삼성의 과거와 현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삼성의 성장은 오롯이 삼성을 구성하는 모든 구성원의 힘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힘을 하나로 묶는 데는 이병철,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건희 회장이 2대 경영자로서 성과를 내지 못했다면 3세 경영에 명분이 없었겠지만, 이건희 체제에서 삼성은 글로벌 초일류기업으로 큰 성정을 했습니다. 회사 전략에 영향력을 미치는 삼성 조직구성원들과 삼성의 수많은 주주들은 이재용 부회장에게 아버지가 보여줬던 역할을 기대하고 있어요. 전문경영인에게 기대하는 시너지와 역량을 뛰어넘는 구심점 역할 말이죠.”
그러면서 그는 이재용 부회장의 첫 사업이자 첫 실패작이었던 삼성의 인터넷 비즈니스 플랫폼 사업 ‘e삼성’을 언급했다. e삼성은 이재용 부회장이 후계자 수업을 받기 바로 직전인 지난 2000년 설립한 인터넷 비즈니스 회사다. 100억 원이라는 결코 적지않은 자본금으로 시작한 이 회사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1년 만에 자취를 감췄다.
이재용 부회장의 실패는 호사가들이 주목하기에 충분한 이슈였다. 사업에 실패하자마자 상무로 복귀한 것을 두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이재용 부회장의 커리어에서 ‘흑역사’로 남아있는 ‘e삼성’을 실패라는 결과에만 초점을 맞춰 바라보는 건 무리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A 씨는 말한다.
“나름 이재용 부회장은 e삼성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서 컴퓨터를 공부했고, 미국에서 선진 인터넷 비즈니스와 전자상거래를 목격하기도 했으니까요. 특히 인터넷 비즈니스는 그 자체로서의 힘을 넘어 다른 사업과의 시너지를 도모할 수 있는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e삼성을 통해 차세대 먹거리를 발굴해보겠다는 의도도 있었죠. 그리고 또 하나 주목해야 할 부분은 당시의 시대적 흐름입니다. 닷컴 열풍이 불면서 너도나도 IT기업으로 이직하거나 창업하려는 움직임이 거셌죠. 삼성도 예외는 아니었어요. 수많은 인재들이 삼성을 나가 창업을 시도했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e삼성이 미래 먹거리인 IT 쪽 인재를 묶어두기 위해 e삼성을 만들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아무튼 결론적으로 e삼성 자체는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재용 부회장의 능력을 의심하고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병철 선대회장도, 이건희 회장도 수많은 실패를 겪으며 성공을 향해 나아갔으니까요.”
◆존재감을 드러내다.
2014년 5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급성 심근경색으로 입원하자 업계는 자연스럽게 이재용 부회장의 역할에 주목했다. 이건희 회장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급격한 변화는 없을 것으로 전망됐다. 자연스러우면서도 점진적인 세대교체를 통해 경영권을 승계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큰 틀의 경영 전략 변화는 없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예상 밖으로 전개됐다. 지난 2014년 11월, 삼성전자가 6,000명 수준의 대규모 구조조정을 발표한 것이었다. 주목할 부분은 구조조정이 진행된 사업부가 바로 삼성전자의 핵심 부서인 ‘IM부문’이었다는 점이다. IM은 IT와 모바일(Mobile)의 첫 글자를 딴 것으로, 삼성전자의 성장과 실적을 견인 핵심 부서다.
IM부문의 구조조정은 대한민국 산업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이 같은 결정의 배경에 관심이 증폭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물론 그 답을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핵심부서의 대규모 구조조정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회사의 최고 결정권자, 즉 이재용 부회장이 유일했기 때문이었다.
“아시다시피 인사권은 최고 결정권자의 고유 권한입니다. 이런 점에 비춰보면 당시 구조조정은 사실상 이재용 부회장의 최고경영자 등극을 대내외적으로 공표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어요. 특히 주목해볼 부분은 당시 구조조정의 방식이었습니다. 흔히 우리는 구조조정을 ‘내외부적 요인으로 불가피하게 인력을 내치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는데요. 당시 삼성전자의 구조조정은 조금 달랐습니다. IM부문의 인력 6,000명을 가전 부문으로 이동시키는 것을 골자로 했으니까요. 이는 오롯이 최고경영자의 전략적 선택이라고 밖에 볼 수 없어요. 당시의 구조조정은 가전 부문을 미래 먹거리로 점찍고 역량을 강화해 글로벌 기업과 경쟁하겠다는 이재용 부회장의 비전이 담겨있는 결정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과론적으로 당시 결정은 ‘신의 한 수’로 평가받고 있다. 더 이상의 급격한 기술적 진보가 불가능하다고 불렸던 스마트폰 시장에서 삼성전자는 접어 쓰는 ‘폴더블폰’과 첨단 기술로 무장한 스마트폰 갤럭시 시리즈로 여전히 독보적인 경쟁력을 과시하고 있다.
가전 부문도 마찬가지다. 백색가전 시장에서 글로벌 리더로 자리매김했고, 매년 개최되는 각종 글로벌 가전 박람회에서 혁신적 기술을 장착한 제품을 출시하며 ‘패스트 팔로워’가 아닌 ‘퍼스트 무버’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IM부문의 구조조정을 발표한 지 채 일주일도 안돼 방산부문 계열사를 한화그룹에 매각하는 이른바 ‘빅딜’의 성사를 공표했다. 당시 빅딜은 삼성과 한화, 양사 뿐만 아니라 재계의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진행된 대기업 간 빅딜 중 최대 규모(약 2조 원)로, 한화그룹은 이를 통해 단숨에 재계 순위 9위로 뛰어오르기도 했다.
당시 빅딜에 대해 수많은 설이 오고 갔다. 양사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보도가 이어졌다. 명백한 사실은 당시 빅딜로 당장의 긍정적 변화를 맞은 곳은 한화그룹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삼성은 어땠을까? 사실 삼성은 당시 빅딜로 크게 이득을 얻지도, 그렇다고 큰 손해를 입지도 않았다. 수 조원의 돈이 오가는 빅딜이었음에도 당시 삼성그룹의 입장은 차분함 그 자체였다. 당시 삼성은 빅딜 이슈가 공표된 이후, ‘전략적 선택’이라는 말 외에는 별다른 코멘트를 달지 않았다.
일각에선 이 빅딜 역시 이재용 부회장의 ‘대관식’ 성격이 짙었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후계자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고, 최고경영자로서 이 정도 규모의 빅딜을 진행할 수 있는 입지에 올랐음을 대내외에 알리려는 의도가 숨어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건희 회장이 건재했을 때부터 이어져 온 빅딜 논의의 마침표를 이재용 부회장이 찍은 것일 뿐이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재용 부회장에게 결정권이 없었다면 아마 이 빅딜은 성사되지 않은 채 지금까지 표류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업계 전문가들은 한 달 사이에 벌어진 급격한 변화를 통해 이재용 부회장이 생각하는 전략적 방향성을 조심스럽게 엿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바로 ‘선택과 집중’이다. 사실 선택과 집중은 모든 비즈니스 업계에서 통용되는 말이다. 많은 기업들과 경영자들은 이제 방만함에서 벗어나 ‘선택과 집중’을 통해 회사의 성장을 도모하고 있다.
하지만 삼성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이병철, 이건희 체제에서 삼성은 언제나 ‘일등’을 외쳤다. 일등이 아니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 그렇기에 삼성이 하는 모든 사업에선 무조건 일등이 돼야 한다는 것이 삼성의 성장을 이끈 토대이자 정신이었다.
과거 삼성전자의 브랜드 컨설팅을 맡았던 맥킨지의 한 수석연구원은 삼성의 ‘일등주의’의 본질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사실 삼성전자는 다른 기업과 비교했을 때 그리 뛰어난 부분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조직 구성, 인재, 사업 내용 등에서도 별다른 차이점을 찾지 못했어요. 오히려 조직이 설정하는 목표치가 능력에 비해 과도하게 높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죠. 한눈에 보기에도 객관적으로 실현이 불가능한 목표를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이런 제약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로 그 목표를 달성해냈다는 점이에요. 전문가 입장에서 봤을 때 목표 달성 자체가 객관적으로 불가능해 보였거든요. 오랜 기간 일등을 지향하는 조직 문화, 즉 일등을 향해 모두가 힘을 합쳐 나아가야 한다는 단결심과 협동심이 이러한 미스테리를 설명할 수 있는 열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재용 부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과거에 그랬듯 모든 분야에서 1등을 하겠다고 나서는 건 현실과 맞지 않는 전략이라고 생각했다. 잘하는 것을 더욱 잘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래 먹거리로 점찍은 시장에 과감한 투자를 진행해 일등이 되는 것도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삼성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기로 결정했다.
큰 틀의 변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선택과 집중’이 이재용 시대의 변화를 함축한 것이라면, 2016년 진행된 삼성생명 태평로 본사 빌딩 매각은 이재용 체제의 새로운 출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태평로 본사는 삼성그룹 역사에서 엄청난 상징성을 가진 건물이다. 지난 1961년 동방생명(현 삼성생명)을 인수하며 본격적으로 금융사업에 뛰어든 삼성은 1984년 태평로 부지에 사옥을 준공했다. 이후 30여 년간 삼성생명은 태평로에서 국내 최대 보험사로 성장·발전해왔다. 이처럼 삼성그룹을 대표하는 건물로 자리매김해온 태평로 빌딩을 매각한다는 건, 그것도 충분히 재력을 갖춘 삼성그룹이 빌딩을 매각하는 건 세간의 큰 주목을 받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물론 당시 결정 역시 이재용 체제의 ‘선택과 집중’ 전략에 따른 결정이었다. 실제로 태평로 본사 매각 후 이어진 계열사의 이전 상황을 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사옥을 매각한 삼성생명 뿐만 아니라 삼성의 모든 금융 계열사들은 전부 삼성전자 서초사옥으로 집결했다. 금융이라는 연결고리를 가진 모든 계열사가 한 곳에 모이면 엄청난 시너지 창출을 기대할 수 있었다.
◆이재용 체제 하의 삼성 미래는?
이재용 체제가 본격화된 이후, 삼성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지난 2016년 불거진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에 삼성과 이재용 부회장이 연루된 것이었다. 특히 경영권 승계와 관련해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는 의혹이 제기되며 결국 이재용 부회장은 2017년 2월 구속됐다.
이후 법정공방 끝에 지난해 2월 이재용 부회장은 석방됐다. 여전히 이 논란은 완벽히 해소되지 않은 상황이다. 중요한 건 지금부터다. 일각에선 ‘이재용 부회장이 없다고 삼성전자가 망하지는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그 말에도 일리는 있다. 이미 삼성은 각 계열사 별 전문경영인 체제가 공고하게 확립되어 있다. 사업 역량에도 문제가 없다. 실제로 이재용 부회장이 구속 수감된 1년 동안에도 삼성의 실적이나 주가에선 부정적인 부분이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삼성에겐 이재용 부회장이 필요하다. 엄밀히 말하면 전문경영인이 아닌 ‘오너’가 필요하다. 삼성이 그 동안 글로벌 초일류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바로 공고하게 자리 잡은 ‘오너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발 빠른 의사 결정과 통 큰 투자, 글로벌시장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한 전략의 중심에는 언제나 오너였던 이병철, 이건희가 있었다. 그리고 현재 삼성에서 오너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은 이재용 부회장이 유일하다.
향후 이재용 부회장의 또 다른 잘못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당연히 법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아직 확정되지 않은 사실과 의혹만으로 사실상 대한민국 경제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는 기업을 흔드는 것은 문제가 있다.
출소 직후 구치소 정문 앞 포토라인에거 그는 “좀 더 세심하게 살피고 열심히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차에 올랐다. 그리고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이재용 부회장은 출소 후 광폭행보를 보이며 삼성의 변화와 혁신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주요 사업 영역에서 삼성은 혁신의 대명사다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난 2월 ‘갤럭시 언팩’ 행사에서 공개된 ‘갤럭시 S10’과 세계 최초 폴더블 스마트폰 ‘갤럭시 폴드’는 주요 외신들로부터 ‘전세계 프리미엄 스마트폰 시장에서 새 지평을 열었다’ 등의 찬사를 받았다.
특히 반도체 시장의 경우 이재용 체제 속에서 이른바 ‘초격차 전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세계 최초로 3세대 10나노급 D램 양산에 성공하며 2위인 SK하이닉스와의 기술 격차를 1년 이상 벌렸다. 이는 주력 제품인 D램의 업황 악화를 실력으로 극복하겠다는 이재용 부회장의 의지가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일부 전문가들은 이재용 부회장이 완벽하게 경영일선에 복귀했다고 보기에 다소 무리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법적 문제가 아직 남아있는 상황에선 대규모의 기업 인수합병(M&A) 같은 굵직한 경영 행보를 보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큰 틀에서의 경영 전략과 비전을 보여줘야 할 시점이 바로 지금이라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눈에 띄는 부분은 바로 글로벌 활동이다. 지난해 출소 이후 지난 3월까지 공식적으로 외부에 알려진 이재용 부회장의 해외출장 건수는 12회에 이르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글로벌 행보에 나선 셈이다. 물론 이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일 뿐, 비공식 활동까지 합하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날 수도 있다.
그러는 사이 주목할 만한 성과도 나타났다. 미국 전장부품업체 하만(Harman)을 삼성전자 역사상 최대 규모인 80억 달러(한화 약 9조 원)에 인수했다. 당시 협상에서 이재용 부회장은 직접 미국으로 날아가 하만 경영진과 담판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특히 하만 인수는 이재용 부회장이 자동차 전장부품사업을 새로운 먹거리로 점찍은 후 진행한 첫 결실이라는 점에서 세간의 큰 주목을 받았다.
그 밖에도 미국의 루프페이를 인수해 갤럭시 시리즈의 새로운 경쟁력으로 자리매김한 모바일 결제 서비스 ‘삼성페이’를 출시했고, 인공지능업체 ‘비브’, 메시지 서비스기업 ‘뉴넷캐나다’ 등을 인수하며 ICT 사업 역량 강화에 나서고 있다. 또 최근에는 인도, 아랍에미레이트, 일본 등 주요 국가의 기업인들을 만나 5G를 포함해 ICT 관련 협업을 논의하고 있다.
미래 먹거리에 대한 비전과 큰 그림, 이에 대한 확신을 능력과 성과로 보여주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단 현재 상황은 나쁘지 않다. 최근 스마트폰, 반도체, 가전 등 삼성의 주력 시장에서 큰 폭의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기존 강자들의 성장세가 주춤한 반면, 신흥 시장 기업의 성장세가 두드러지고 있다. 특히 화웨이, 하이얼, 샤오미 등 중국 기업들의 굴기(?起)가 본격화되면서 경쟁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재용의 삼성이 내세운 ‘선택과 집중’ 전략은 꽤 유용하게 작동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을 예견이라도 한 듯 일찌감치 구조조정과 사업부 재편을 통해 IM부문과 가전 부문의 경쟁력 강화를 도모했기 때문이다. 이재용 체제가 사실상 시작된 지금, 선택과 집중이라는 기조가 변화할 가능성은 매우 적다. 변화와 혁신을 위해서라면 수십 년간 할아버지, 아버지가 이어온 전통도 과감히 버릴 수 있다는 이재용 부회장은 자신의 경영 철학을 삼성에 뿌리내릴 적기를 바로 지금으로 보고 있다.
지난 1993년 이건희 회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신경영’을 선언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라며 강도 높은 혁신을 주문했던 이건희 회장은 이를 기반으로 삼성의 큰 변화를 이끌어냈다. 이제 이건희 회장의 자리에는 아들 이재용 부회장이 서 있다. 그 역시 혁신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내용은 조금 다르다. 이건희 회장이 ‘변화’를 강조했다면, 이재용 부회장은 ‘파괴’를 내세운다. 혁신에 필요하다면 기존의 틀 따위는 과감히 부셔버릴 수 있다는 것이 이재용의 ‘혁신’이다.
이는 시장 상황과도 무관치 않다. 최근 산업계의 트렌드는 이종사업 간의 융합이다. IT와 금융, 건설, 유통 등 산업간 장벽이 깨지고 통합되길 반복하고 있다. 기존의 틀 안에서 살길을 모색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어찌 보면 이재용 부회장이 지켜 나가고자 하는 유일한 한 가지는 오직 ‘삼성’이라는 이름뿐일지도 모른다. 파괴의 혁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리더로서 삼성, 나아가 한국 경제의 실질적 에이스인 이재용 부회장이 보여줄 역할과 헌신에 대한민국과 아시아, 글로벌시장이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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