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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삶의 책장에 스며든 '보이스와의 추억'

[인간 백남준을 만나다]

<17>요제프 보이스와 '보이스 복스'





백남준의 1990년작 ‘보이스 복스(Beuys Vox)’ 중 일부. 백남준이 1961~1988년 작업 중 의미있게 선정한 21가지 구성품이 하나의 작품을 이루는 일종의 ‘종합작품세트’이다. 병풍 속 모자 쓴 인물이 백남준의 예술적 동지 요제프 보이스다. /사진제공=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의 첫 개인전이 열린 1963년 3월 독일 소도시 부퍼탈의 파르나스 갤러리. 훗날 비디오아트의 탄생 쇼로 불리게 된 이 ‘전자 텔레비전과 음악의 전시’의 개막식이 열리던 날, 백남준은 13대의 TV를 들여놓은 전시실에서 마지막 조율작업을 하느라 웅크리고 있었다. 문득 옆방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후딱 나가봤다. “땅바닥에 누워있는 이바흐(Ibach) 피아노를 누가 도끼로 부수고 있지 않은가?”

도끼로 피아노를 부수고, 바이올린을 내리쳐 박살 내는 것은 이미 유명해진 백남준의 ‘전매특허’였다. 원래는 자신이 부술 계획이었던 피아노를 다른 사람이 먼저 부수고 있으니 백남준도 놀랐다. 하지만 이내 그의 ‘즉흥연주’에 빠져들었다. 공연, 즉 피아노 부수는 행위가 끝나자 관객들이 갈채했다. 백남준도 함께 박수를 쳤다. 모자를 살짝 들어 올려 감사 인사를 한 그의 이름은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1921~1986). 예술이 상업적으로 유통되는 것에 반대한 보이스는 우연성에 기반한 해프닝을 펼쳤고, 사회적 의미의 개념미술을 추구했으며 예술이 어떻게 삶과 융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독일 태생의 보이스는 제2차 세계대전에 공군으로 참전했다. 1943년 러시아 상공에서 비행기가 격추돼 크리미아반도에 추락한 그를 타타르족이 구출했고 펠트 담요와 비계 덩어리로 살려낸 일화가 유명하다. 1946년 말에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보이스는 뒤늦게 미술대학에서 공부했다. 보이스는 기름 덩어리와 펠트를 소재로 한 작품을 발표했고 이후 고정된 예술을 거부하며 모든 삶의 형태를 예술의 일부로 삼았다.

전 세계 미술가의 종합순위를 매기는 유럽 기반의 현대미술 리서치 사이트 아트팩츠넷을 보면 앤디 워홀을 필두로 파블로 피카소, 게르하르트 리히터, 브루스 나우만에 이어 5위가 바로 보이스다. 100위 안에 유일한 한국인 작가 백남준은 31위다.

백남준은 보이스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도대체 그 도끼가 어디서 나타났느냐”를 궁금해했다. 부서진 골동 피아노는 백남준이 ‘부수기 퍼포먼스’를 위해 독일 피아노 명가인 이바흐 집안에서 어렵게 구해다 놓은 것이었다. 전시 후 백남준은 반쪽밖에 남지 않은 피아노를 돌려줬고 이바흐 가족은 반쪽짜리 피아노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백남준은 이를 두고 “그 피아노가 만약 오늘날까지 남아있다면 보이스의 초기작품, 즉 보이스가 손질한 초기의 피아노로서 100만 달러는 평가할 만한 작품”이라며 “선견지명이 없었던” 것을 후회했다. 다행인 것은 그 날의 사진이 남았다는 사실인데 “보이스가 모자를 벗고 사진을 찍게 한 희귀한 흔적”이라며 백남준도 흐뭇해했다. 보이스는 항상 트레이드 마크 같은 중절모자를 쓰고 다녔다.

백남준 스스로가 “내 인생의 행운의 하나는 케이지가 완전 성공하기 전에, 보이스가 거의 무명 때에 만나놓은 것”이라 했을 정도로 보이스는 백남준 예술에서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존재다.

1963년 ‘전자 텔레비젼…’ 전시 개막날

누군가 백남준 전매특허 악기 부수기 따라해

알고보니 현대미술의 거장 요제프 보이스

백남준의 1990년작 ‘보이스 복스(Beuys Vox)’ 중 일부. 백남준이 1961~1988년 작업 중 의미있게 선정한 21가지 구성품이 하나의 작품을 이루는 일종의 ‘종합작품세트’이다. /사진제공=백남준아트센터




사실 둘은 백남준의 개인전 이전에도 만난 적 있었다. 1961년 여름, 뒤셀도르프의 쉬멜라 갤러리에서 열린 ‘제로그룹’의 개막행사에 간 백남준은 어떤 남자가 “파이크(Paik·백을 부르는 독일식 발음)”라고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내 생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서 내 이름을 불리운 것은 처음이었다”는 백남준은 “그가 내 데뷔 콘서트에서 내가 입은 옷, 목도리의 보라빛, 콘서트의 여러 장면을 정확하게 외면서 민망스럽게까지 내 연주를 칭찬해 주었다”고 회고했다. 1959년 갤러리22에서 ‘존 케이지를 위한 오마주’라는 제목으로 벌인 백남준의 첫 퍼포먼스를 보이스가 봤던 것이다. 당시 백남준은 도끼로 피아노를 때려 부쉈다. 전통적인 예술방식과의 작별을 고하고 새로운 예술의 추구를 선언하는 행동이었다. 그 백남준을 기억했던 보이스는 “독일과 네덜란드 국경에 큰 아틀리에가 있으니 한번 와서 연주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이듬해인 1962년 6월 16일 뒤셀도르프의 캄머스필레 공연장에서 열린 ‘음악에서의 네오다다(Neo-Dada in der Musik)’에서 백남준이 ‘바이올린 독주(On-for Violin Solo)’를 할 때도 보이스가 객석에 있었다. 백남준의 연주라는 게 바이올린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가 갑자기 내리쳐 박살 내는 공연이다. 이를 보던 시립관현악단의 연주자가 “바이올린을 살려주라”고 외쳤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아랑곳없이 백남준이 공연하는 동안 보이스는 “콘서트를 방해하지 말라”며 바이올리니스트를 공연장 밖으로 끌어냈다.

1963년 2월 뒤셀도르프 주립 미술아카데미에서 플럭서스(Fluxus) 그룹의 단체 공연인 ‘플럭서스 페스티벌-음악·반음악·악기극장’이 열렸다. 보이스가 포스터를 제작했다. 공연도 했다. 보이스는 죽은 토끼를 칠판에 걸어 칼로 심장을 도려낸 후 그 앞에서 에릭 사티에의 음악을 피아노로 연주했다.



백남준의 1990년작 ‘보이스 복스(Beuys Vox)’ 중 일부. 백남준은 요제프 보이스를 상징하는 중절모자를 시멘트로 제작해 그 안에서 풀이 돋아나게 했다. /사진제공=백남준아트센터


기이하기로는 막상막하였던 백남준과 보이스는 그렇게 서로를 알아봤고 친구가 됐다. 1964년 6월 미국으로 간 백남준은 1965년에 첼리스트 샬롯 무어맨과 유럽으로 음악여행을 떠났다. 첫 개인전을 열었던 부퍼탈의 파르나스갤러리에 다다랐다. 보이스를 포함한 8명의 퍼포먼스 공연 ‘24시간’이 기획됐다. 기름 덩어리에 천착하던 보이스는 사과 궤짝만큼 큰 버터를 삼각형으로 잘라서 베개 삼아 드러눕기도 하고, 그 옆에 자루가 셋 달린 부삽을 세우기도 했다. 어떤 이는 시를 지어 완성된 시를 작은 금고에 넣고 잠궈버리는가 하면, 관객이 없을 때만 연주하고 관객이 오면 연주를 멈추는 등의 반(反)예술로 가득한 행사였다. 백남준은 무어맨과 협연하려고 했는데 연주를 시작하자마자 무어맨이 무대 위에서 잠들어버렸다.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깨워도 일어나지 않자 백남준도 어쩔 수 없었다. 피아노곡을 치면서 그냥 자는 체 해버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긴장한 무어맨에게 누군가가 술을 권했는데 그 안에 독한 수면제가 들어 있었다. 결국 백남준은 혼자 방으로 가 ‘제대로’ 자 버렸고 무어맨은 새벽 2시에 깨어 혼자 연주했다고 한다.

백남준의 1990년작 ‘보이스 복스(Beuys Vox)’. 백남준이 1961~1988년 작업 중 의미있게 선정한 21가지 구성품이 하나의 작품을 이루는 일종의 ‘종합작품세트’이다. /사진제공=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과 보이스는 각자의 작품세계를 구축하면서도 ‘함께’할 공연을 구상했다.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인공위성 듀엣을 한다거나, 샤머니즘에 대한 공통관심사가 있으니 서울에서 같이 굿판을 벌여보자는 모의를 했다. 심장병을 앓았던 보이스는 1985년에 폐렴에 이어 폐 근육이 딱딱해져 공기가 폐 속으로 잘 들어가지 않는 병까지 걸렸다. 그러던 중 함부르크의 ‘평화비엔날레’에 협연을 제안받았다. 백남준은 보이스의 걱정이 염려돼 거절했으나 보이스가 하겠다고 나섰다. 보이스가 독성 강한 진통제를 쓴다는 것을 안 백남준은 함부르크행을 취소하게 했다. 공연 날 백남준은 숨쉬기 어려운 보이스를 상징하듯 산소탱크를 매단 그랜드피아노를 전화확성기와 함께 설치했다. 보이스는 전화로 공연에 참여했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공연 한 달 후쯤 보이스는 세상을 떠났다.

1959년 ‘존케이지…’ 공연으로 인연, 평생 친구로

기이한 작품성향에 동질감…평화비엔날레 등 협연도

“그가 무명일때 만나건 인생의 행운”…예술에 큰 영향

1990년作 ‘보이스복스’엔 우정기록물 한가득



백남준이 1990년 원화랑과 갤러리현대의 전시를 통해 선보인 작품 ‘보이스 복스(Beuys Vox)’는 1961년부터 1986년까지 함께한 보이스와의 추억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작품명의 ‘복스’는 목소리라는 뜻으로 소리대로 라면 ‘보이스의 보이스’ 혹은 ‘보이스의 박스(box)’ 등 중의적으로 해석된다. 백남준이 즐겼던 플럭서스식 조어법이다. ‘보이스 복스’는 둘이 처음 대화했던 1961년 제로그룹 개막행사의 포스터부터 백남준의 1962년 갤러리22 공연을 방문한 보이스가 적은 방명록의 서명, 1963년 보이스가 제작한 플럭서스 콘서트 포스터 등 총 21개의 구성품이 하나의 세트를 이룬다. 전쟁통에 자주 짐을 싸야했던 마르셀 뒤샹이 자신의 대표작을 미니어처로 제작한 ‘여행용가방’ 시리즈와 비슷한 성격의 ‘종합작품세트’이다.

백남준의 1990년작 ‘보이스 복스(Beuys Vox)’ 중 일부. /사진제공=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과 요제프 보이스의 우정 기록물이자 작업 과정의 기념비적 기록을 모은 아카이브 성격의 작품이기도 하다. 보이스가 퍼포먼스 하는 모습, 피아노 두 대를 마주대고 백남준과 보이스가 공연하는 사진도 들어있다. 플럭서스 운동의 핵심적 인물인 조지 마키우나스, 장 피에르 빌헬름 등의 기록적 사진도 포함됐다. 백남준의 1984년 ‘굿모닝 미스터오웰’ 위성쇼의 제작비 마련을 위해 보이스와 존 케이지가 함께 제작한 판화도 큰 의미를 갖는다. 보이스와의 마지막 공연사진인 산소탱크를 매단 피아노 사진은 찡한 감동을 전한다. 보이스의 상징인 중절모자를 시멘트로 제작해 그 사이로 풀이 자라나게 한 구성품에 대해 백남준은 “모자에 풀이 나는 것은 유목민의 연상”이라고 설명한다. 텔레비전 위에 달 모양의 백자 구(球)를 높고 그 위에 작은 청자 토끼를 얹은 ‘달 위의 토끼’는 백남준의 예술세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지도 형식의 판화도 2점 있다. 하나는 크리미아 반도 위에 불타는 모자를 그려넣어 보이스의 추락사고를 보여준다. 또 하나는 세계지도인데 한반도에서 날아온 백남준과 보이스의 만남을 은유한다. 보이스의 연주 모습을 작은 병풍형태로 제작한 것을 보면 백남준이 친구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백남준의 1990년작 ‘보이스 복스(Beuys Vox)’ 중 일부. /사진제공=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이 ‘보이스 복스’에 포함시키고 싶었으나 넣지 못한 사진도 있다. 백남준과 무어맨이 2차 대전 격전지였던 솔로몬 제도의 구아달카날도에서 버려진 비행기 잔해 위에 앉아 보이스의 곡을 연주하던 당시의 모습인데, 사진 촬영자와 저작권 문제로 갈등이 생겨 ‘보이스 복스’에서는 빠졌다.

백남준은 ‘보이스 복스’ 전시 기간에 맞춰 서울 종로구의 갤러리현대 뒷마당에서 보이스와 함께 하고 싶었던 ‘굿’을 그를 기리는 진혼굿 형식으로 바꿔 공연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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