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을 갚지 못해 아예 사업을 접기로 한 기업 수가 지난해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가운데 서울과 지방 기업 간 경영 양극화도 극심해진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기업보다 지방 기업의 파산 증가세가 뚜렷하게 가팔라진 것이다. 게다가 기업회생 신청 증가폭은 완만해지는 데 반해 법인 파산 신청 수만 유독 폭증하고 있어 경기둔화 신호가 점점 더 강해지는 것으로 진단됐다.
21일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지난해 법원에 법인 파산을 신청한 기업과 기업회생을 신청한 기업 수는 각각 931곳, 1,003곳을 기록했다. 모두 ‘통합도산법(채무자 회생·파산에 관한 법률)’이 처음 시행된 지난 2006년 이후 사상 최대치다.
이 가운데서도 법인 파산의 증가 속도는 일정 수준 빚을 탕감해달라는 기업회생을 압도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기업회생 신청기업 수는 2018년 980곳에서 지난해 2.3% 증가하는 데 그쳤지만 법인 파산은 전년 807곳보다 15.4%나 더 늘어났다. 2009~2016년 기업회생과 파산 신청 간 격차는 196~443건에 달했지만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부터는 2017년 179건, 2018년 173건으로 줄더니 지난해에는 고작 72건으로 좁혀졌다. 지역별로도 파산부를 운영하는 전국 14개 법원 가운데 법인 파산 접수는 서울회생법원(445건)과 의정부(35건)·인천(49건)·수원(145건)·대전(60건)·청주(17건)·울산(14건)·창원(44건)·전주(21건)지방법원 등 무려 9곳이 신기록을 세웠지만 기업회생의 경우 수원(155건)·대전(85건)·대구(104건)지법 등 3곳만 최대치를 기록했다. 새 주인을 만나는 등 재기를 노리느니 차라리 문을 닫겠다는 회사가 그만큼 늘고 있다는 방증이다.
법인 파산은 연말도 되기 전인 지난해 11월 이미 848건을 기록해 역대 최대치를 갈아치웠다. 월별로도 8월 한 달을 제외하면 1월부터 12월까지 11개월 동안 기존 기록을 빠짐없이 경신하는 기현상을 보였다. 지난해 4월에는 파산 접수기업 수가 107곳을 기록해 사상 처음으로 월별 세자릿수에 도달했다.
게다가 파산기업의 지방 집중화는 점점 심해지는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서울회생법원에 접수된 파산 신청(445건)은 2018년(402건)에 비해 10.7%만 증가했으나 나머지 지방(486건)에서는 전년(405건)보다 20.0%나 급증했다.
이는 이전과는 다른 양상이다. 현 정부 집권 직전인 2016년만 해도 서울회생법원에 접수된 파산 신청 건수(390건)는 지방법원 파산부를 찾은 기업(350건)보다 40건이나 많았다. 이후 2017년(서울 351건·지방 348건) 그 격차가 3건으로 줄더니 2018년(서울 402건·지방 405건)에는 결국 역전현상이 벌어졌다. 이어 지난해에는 그 차이가 41건까지 벌어졌다.
지역별로는 전자·자동차 부품 업체가 밀집한 수원지법과 인천지법의 파산 접수기업 수가 전년 대비 66.7%, 32.4% 증가해 지역경제의 어려움을 드러냈다. 경기 북부를 관장하는 의정부지법에서도 52.2% 늘었다. 대표적인 제조업 도시인 울산·창원지법도 2018년보다 각각 16.7%, 12.8% 파산 신청을 더 접수해 전체 증가폭을 키우는 데 기여했다. 현대자동차가 포진한 울산에서는 통계 작성 후 2016년까지 단 한번도 두자릿수 파산이 없다가 2017년부터는 매년 10건 이상의 파산을 접수하고 있다. 창원은 조선업 불황이 파산 신청 증가세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GM 공장과 현대중공업 조선소가 폐업한 군산 지역을 관할하는 전주지법에도 파산 신청이 1년 새 31.3% 폭증했다.
기업회생 부문에서도 서울과 지방 간 양극화 현상은 뚜렷했다. 지난해 서울에 접수된 기업회생 신청 건수(343건)는 2018년(389건)보다 11.8% 뒷걸음질쳤지만 나머지 지방(660건)에서는 전년(591건)에 비해 11.7% 늘었다. 지역별로는 의정부(130.8%)·수원(80.2%)·청주(50.0%)·대구(26.8%)·대전(23.2%)지법 등의 증가폭이 컸다.
지방 기업이 이렇게 극도로 부진을 겪은 것은 현 정권 초부터 추진한 무리한 소득주도 성장과 가파른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근로제 강행, 소비 위축 등 정책·경제환경 변화에 이들이 서울 기업보다 더 취약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아울러 지방으로 갈수록 제조업 비중이 큰 만큼 관련 제조업 불황 효과가 하청업체 줄도산으로 먼저 나타났다는 분석이다.
법조계와 산업계에서는 법인 파산, 기업회생이 경기 후행지표의 성격은 있지만 지난해 연중 내내 수치가 좋지 않았던 만큼 올해도 관련 지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성장동력이 더 떨어진 상황에서 올해는 지난해보다 법인 파산 수가 더 늘어날 수 있다는 전망이다.
서울회생법원의 한 관계자는 “최근 계속기업가치가 떨어져 회생은커녕 공장을 더 돌릴 이유가 없는 기업들이 많이 늘었다는 것을 현장에서 크게 체감한다”며 “그나마 제조업체가 적은 서울은 상황이 낫지만 지방은 한계상황에 이른 업체들이 크게 증가했다”고 말했다.
/윤경환기자 ykh22@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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