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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거리를 온종일 어슬렁...원수 같은 '모던보이의 방랑'

[박상진의 문학으로 쓰는 이야기]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구보=원수+아무개'...오갑빠 머리에 근시안경 쓴 독특한 이미지

동경 유학까지 다녀와 이곳저곳 떠돌며 군중 속 외부 관찰자로

강요된 근대화에 갈등·저항하는 '지적 성찰자' 모습으로 다가와





오디세우스 이야기의 변주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 이야기는 서양문학사에서 꾸준히 변주되어왔다. 기원으로 돌아가는 대신 귀환을 유보하는 오디세우스 이야기는 이미 여러 형태로 변주될 운명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작가 박태원이 묘사한 구보의 방랑은 오디세우스 이야기가 1930년대 일제강점기 경성에서 재연된 경우다. 박태원이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직접 참조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이것도 오디세우스 이야기의 변주다)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 어떻게든 거기에 닿는다 할 수 있다. 오디세우스 이야기의 핵심은 방랑이며, 그로 인한 기원의 부재, 그리고 귀환의 유보다.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초판본 장정 /사진제공=성북구립미술관


구보 박태원(1909~1986)의 중편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1934년 8월 1일부터 9월 19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되었다. ‘구보(仇원수/甫아무개)’라는 명칭은 일명 ‘오갑빠’ 머리에 고도 근시 안경을 쓰고 신경안정제를 복용하던 작가의 독특한 이미지를 반영한다. 게으름과 병치레를 포함하여 잘나고 못난 아홉 가지 특징을 지닌 아무개(九甫)라는 뜻도 된다. 소설가 구보는 하루 동안 경성 시내를 하릴없이 방랑한다. 어머니가 바느질을 하며 기다리는 집에서 시작해 다리 어귀, 전차, 경성역 삼등 대합실, 다방, 영화관, ‘대창옥’이라 불리는 설렁탕 집과 같은 수 많은 장소들이 병렬된다. 들르는 장소들은 하나하나가 도착지이고 다음 도착지를 예고하지만, 궁극의 도달점은 계속해서,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유보된다.

젊고 자유로운 아들의 ‘방랑’은 집에서 그를 기다리는 늙은 어머니의 ‘정착’과 대비된다(어머니는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의 분신이다.). 아들은 ‘낮’이고 어머니는 ‘밤’의 인물이다. 어머니는 동경 유학까지 하고 돌아온 아들이 무직이라는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 게다가 이 세계에 맞서 아들이 택한 방랑이라는 독특한 대결 방식은 더더욱 이해하기 힘들다. 어머니는 아들의 결혼과 취업을 목표로 설정하지만 아들은 목표를 흩뜨려놓는다. 똑같이 행복을 추구하지만, 어머니는 확고한 반면 아들은 공연스레 어질러놓기만 한다. 어머니의 확신은 직선으로 똑바로 나아가는 반면 아들의 어슬렁거림은 불규칙한 나선을 그린다.

소설가 구보 박태원.


구보의 이야기를 압도하는 것은 기원과 도달로서의 집-어머니가 아니라 그 사이를 채우는 아들의 어슬렁거림이다. 어슬렁거림은 기원과 도달을 필요로 하지 않는, 목적어가 필요 없는 자동사다. 어슬렁거림의 부정성은 부정(不定)과 부정(否定)의 두 의미를 공유한다. 부정(不定)은 정해놓은 목적지가 없음을 의미하고, 부정(否定)은 목적지를 정하지 못함을 뜻한다. 둘은 상통한다. 정처 없음은 목적지의 거부이지만, 이는 목적의 상실이 아니라 열림을 뜻한다. 이루어야 할 목적은 한 가지로 고정되는 대신 무수한 가능성으로 앞에 펼쳐진다. 그리하여 구보는 도달의 의지 대신 방랑의 의지에 자신을 싣는다.

근대 공간의 병리학

구보는 하루 종일 수많은 장소를 방문한다. 모두가 갈 곳이지만 정작 갈 곳은 하나도 없다. 어디서도 그는 머물지 못한다. 망연히 서 있기를 반복하며 마음은 자꾸만 다른 곳을 향한다. ‘은좌’라든가 ‘히비야 공원’이 과거 유학시절의 추억으로 떠오르다 ‘회상의 무수한 파편’으로 사라진다. 구보는 현재의 처지에 적응하지 못하고, ‘뒤틀린 근대’의 공간 속에 놓인 자신이 낯설기만 하다. 그래서 만나는 대상마다 염증을 느끼고, 만나는 대상을 폭력으로 인식함으로써 혼란을 느낀다.

방랑자 구보는 무정형의 도시 군중과 마주치는 거리에서 내면의 불화를 감지한다. 그는 불화를 없애고자 노력하지만, 불화가 이미 불가항력으로 지속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다. 대신 온갖 질병을 자동으로 감지하는 신체가 불화를 직접 드러내 준다. 그리하여 구보는 별별 질병을 다 지닌 ‘만병객(萬病客)’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약방에서 성장한 영향인지, 작가는 질병의 이름을 열거하는데 퍽 능란하다. 두통, 중이염, 중이질환, 중이가답아, 피로, 신경쇠약, 변비, 요의빈수, 두중, 두압, 신장염, 만성 위확장, ‘바세우도’씨병…. 소설 초반부터 등장하는 잡다한 병명은 중반 이후에 희한하고 야릇한 이름으로 번져간다. 정신병, 음주불감증, 기주증, 갈주증, 황주증, 의상분일증, 언어도착증, 과대망상증, 추외언어증, 여자음란증, 지리멸렬증, 질투망상증, 남자음란증, 병적기행증, 병적허언기편증, 병적부덕증, 병적낭비증, 당의즉답증, 다변증…. 분명 작가 자신의 신조어도 섞여 있을 온갖 종류의 질병이 구보가 거니는 거리를 채운다.





질병의 바이러스는 그가 마주치는 도시 군중을 숙주로 삼아 자라난다. 구보는 그들과 섞이지 못하고 외부에 관찰자로 남는다. 관찰은 소설가로서 구보에게 필요한 일이지만 동시에 소외를 일으키는 요인이다. 그는 소외로 힘들어하면서도, 관찰 내용을 노트에 쉼 없이 기록한다. 군중을 향해 경멸에 찬 시선을 돌리며 수행하는 관찰과 기록이 그로서는 불화와 소외에 대처하는 유일한 길이다.

제국의 외부

근대 도시 군중과 불화를 일으키는 구보의 처지는 일본 제국의 내부에 갇혀있다는 자의식에서 나온다. 모든 것을 일사불란하게 하나로 몰고 가는 제국의 전체주의는 외부를 허용하지 않는다. 구보는 내부에 속하는 강제된 운명을 짊어진 채 반제국적인 회한의 방식으로 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다. 제국의 내부에서 어슬렁거리는 구보는 “불원한 장래에 ‘듄케르 청장관’이나 ‘전기보청기’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르는” 난청을 저주하고, 세련된 인간의 징표인 ‘음료 칼피스’에 자신의 미각을 맞추지 못한다. 이러한 감각의 교란은 소통의 혼란을 가져온다. 그렇게 그의 방랑은 제국이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근대성의 프로젝트에 비자발적으로 연루되는 동시에 저항하는, 뒤엉킨 공간의 지도를 그린다.

1930년대 서울 시내의 모습.


근대 경성의 공간은 혼란스럽게 뒤틀려 와해하고, 어디로든 날아올라야 할 날개는 끈끈이에 들러붙는다. 도시는 도시를 무너뜨리는 것들로 지탱되고, 자본주의는 거짓된 희망의 상징으로 뿌연 빛을 내뿜으며, 군중은 그 빛으로 살아남는다. 안정된 귀환을 한없이 유보하는 구보의 방랑은 새로운 공동체의 화두를 던진다. 그 공동체는 강요된 근대적 공간을 해체하고 재구성함으로써 도달해야 할 목적지이지만, 아직 그에게는 요원하기만 하다.

도달의 의지는 의지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반면, 방랑의 의지는 의지의 정당성을 묻고자 한다. 일제에 의한 근대는 도달해야 할 목표로 주어지지만, 뒤틀려있기에 정당성을 물어야 한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기보다 그저 어슬렁거리는 구보에게 근대는 ‘교정될 근대’로서만 비로소 의미를 획득한다. 근대성의 교정은 구보에게 “좋은 소설”을 쓰리라는 다짐으로 나타나지만,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말미에서 그 다짐은 가능성으로만 제시된다. 구보의 다짐은 목표의 도달보다는 도달하는 과정으로 더 큰 빛을 발한다(그래서 그는 ‘이미’ “좋은 소설”을 쓰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일제에 의해 강요된 근대는 방랑의 길 위에 병렬된 수많은 종류의 근대들 가운데 하나로 서 있을 뿐이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표지.


끝없는 방랑

방랑자 구보는 밤이 이슥하여 집-어머니에 도착하여 이제는 안정을 이루며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지만, 이는 공허한 독백으로 들릴 뿐이다. 그는 밤이 지나면 다시 방랑의 길로 나설 것이며, 그 길에 어김없이 줄지어 선 빈부와 억압, 소외와 모순의 얼굴과 마주칠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는 길 위에서 서성거리며 생각에 잠길 것이다. 단지 바라만 보는 객관적 관찰자 대신 개입하고 행동하는 관찰자로 거듭날 것이다. 그리하여 그 개입의 징표로 계속해서 돋아날 온갖 질병들을 다시 이야기할 것이다.

일상을 살아가는 한 개인으로서 구보는 뚜렷한 지향과 목표를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살아내는 과정의 힘겨움을 낱낱이 토로할 뿐이다. 그런 구보의 방랑은 침묵의 반(反)지성주의에 저항하는 지적 성찰자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방랑자로서의 인간은 그 끝을 아는 존재가 아니라 다만 오늘도 길을 걸어야 하는 존재다. 계속해서 움직이는 한에서만, 인간은 지성의 존재로서 인간됨을 유지할 수 있다. 움직임을 거부하는 부동(不動)의 반지성주의는 지옥의 뚜렷한 징표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서 해야 할 이야기도 그런 것이 아닐까. 병든 사회에서 병든 이야기는 부끄럽지 않으며 회피할 것도 아니다. 우리는 천국의 헛된 기대보다 지옥에 직면해 지옥을 견뎌내는 일의 의미를 더 생각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부산외국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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