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27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스테이플스센터에서 열린 제62회 그래미 어워즈는 형광 녹색 머리를 한 10대 소녀의 독무대였다. 불과 19세 나이에 팝 음악계의 정상에 선 싱어송라이터 빌리 아일리시(Billie Eilish)다.
아일리시는 10대 여성 팝가수 하면 떠오르는 밝고 건강한 이미지를 깨트린다. 10대에 데뷔한 팝스타 브리트니 스피어스나 테일러 스위프트가 보여준 발랄함과 달리 어두움과 불안함을 표현한다. 아일리시는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로 본인이 우울증을 앓으면서 겪은 감정과 자살 충동 등을 가사와 멜로디에 녹여낸다. 그의 대표곡 ‘배드 가이(Bad Guy)’는 스스로를 나쁜 사람이라 칭하는 자기 혐오의 정서를 담았으며, 뮤직비디오는 검은 눈물과 피를 흘리는 기괴한 모습을 영상화했다. 아일리시가 읊조리는 가사는 자신의 이야기인 동시에 불안한 Z세대의 정서를 대변한다. 패션 스타일도 예쁘고 섹시하다기보다는 독특하고 난해하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트레이드 마크가 된 형광 머리와 긴 손톱, 화려한 오버사이즈 의상. 아일리시는 자기 몸이 성적 대상이 싫다는 이유로 몸매를 감추는 헐렁한 옷차림을 고집한다.
기성세대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Z세대는 그의 모든 것에 열광한다. 영국 밴드 라디오헤드 멤버 톰 요크의 표현대로 ‘자신만의 것을 하기 때문’일까. 그의 노래는 대중성과 중독성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며 10대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다. 2016년 싱글 앨범 ‘오션 아이즈(Ocean Eyes)’로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그는 지난해 3월 발매한 앨범 ‘웬 위 올 폴 어슬립, 웨어 두 위 고?’(When We All Fall Asleep, Where Do We Go?)로 단숨에 팝계를 장악했다. 앨범은 지난해 ‘빌보드 200’ 연간 차트 정상에 올랐고, 수록곡 ‘배드 가이’는 빌보드 ‘핫 100’ 연간 차트 4위를 차지했다. 수면 장애와 인간의 공포에서 영감을 받은 이 앨범에 대해 1990년대의 전설적인 록밴드 너바나의 드러머였던 데이브 그롤은 “마치 91년의 너바나를 보는 것 같다”고 평하기도 했다.
앨범의 폭발적 인기로 올 1월 그래미 어워즈에서 아일리시는 그래미 최고 영예인 ‘제너럴 필즈’(본상)로 불리는 ‘베스트 뉴 아티스트’ ‘송 오브 더 이어’ ‘앨범 오브 더 이어’ ‘레코드 오브 더 이어’ 4개 부문을 독차지했다. 한 아티스트가 4관왕을 석권한 것은 1981년 크리스토퍼 크로스 이후 39년 만이고 여성 아티스트로는 최초다. ‘앨범 오브 더 이어’, ‘레코드 오브 더 이어’ 최연소 수상자 기록도 아일리시 차지가 됐다.
음반업계에선 그의 뒤를 이을 ‘넥스트 빌리 아일리시’를 찾으려는 노력이 한창이지만, 당분간은 ‘아일리시 천하’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무엇보다 아직 10대에 불과한 그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그는 오는 11월 개봉할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 주제곡 아티스트로 선정돼 또 한번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007 시리즈 역사상 최연소다. 곡 작업에는 친오빠 피니어스 오코널과 함께 참여한다. 아일리시와 오코널 남매는 어릴 적부터 학교 대신 홈스쿨링으로 작곡을 배우고 공동작업을 해 온 음악적 동반자다.
팝계의 가장 뜨거운 인물로 자리매김한 아일리시의 무대는 한국에서도 곧 만날 수 있을 전망이다. 아일리시는 오는 8월 23일 내한해 한국 팬들을 만날 예정이다. 지난 2018년 8월 15일 첫 번째 내한 공연 이후 2년 만의 내한이다.
/김현진기자 star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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