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토버 서프라이즈(October surprise)’는 미국의 대통령선거가 있는 11월 직전에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예기치 못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말로는 10월의 깜짝쇼, 충격, 이변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존 볼턴 전 미 국가안보보좌관은 지난 7월 초 언론간담회에서 재선 가도에 빨간불이 켜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회담으로 상황을 뒤집으려 할 수 있다며 이를 언급했다. 그러자 며칠 후 북한의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담화를 통해 더 이상의 미북정상회담은 필요 없다고 본다면서 그 이유 중 하나로 “쓰레기” 같은 볼턴이 예언했기 때문이라고 쏘아붙였다. 과연 옥토버 서프라이즈는 가능할까.
북한의 경제 상황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경제제재로 북한의 대중국 수출은 90% 이상 줄어들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1월 이후 중국과의 국경을 폐쇄하면서 그나마 수입도 막혀 장마당의 물건이 씨가 마르고 주민들의 생활고는 더욱 악화됐다. 북한 경제는 2017년 -3.5%, 2018년 -4.1%로 뒷걸음질치다가 지난해 간신히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섰다고 한국은행이 발표했지만 올해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이대로 가면 외환보유액도 바닥이 나고,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에 버금가는 경제난을 겪게 되리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런데도 김 제1부부장은 같은 담화에서 3차 미북정상회담은 미국에나 필요하고 북한에는 무익하다면서 제재해제는 더 이상 북한의 관심사항이 아니라고 힘줘 부인했다. 하지만 강한 부정은 절박함의 표출로 보이고, 큰소리치는 것은 약자의 허장성세로 들린다.
사정이 좋지 않기는 트럼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통제 불능, 경제회복 기대 난망, 인종갈등 심화 등으로 재선 가능성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지난달 월스트리트저널·NBC 여론조사에서 오늘 당장 투표하는 경우 지지하는 후보로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이 50%, 트럼프 대통령이 41%라는 결과가 나왔다. 최근 격차가 좁혀지고 있다지만 언제 다시 벌어질지 모른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반전의 계기를 만들 수 있다면 뭐라도 해보려 할 수 있다는 얘기다.
볼턴 전 보좌관의 저서 ‘그 일이 일어난 방’에 따르면 2019년 하노이 미북정상회담이 아무런 성과 없이 결렬되기 직전까지 트럼프 대통령은 합의 가능성에 미련을 보이면서 김 위원장에게 부분적인 제재해제만 하는 방안, 미국을 위협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폐기를 추가하는 방안을 제안했다고 한다. 다행히 김 위원장이 다 거부했다면서 그때가 “최악의 순간”이었다고 술회했다. 그가 옥토버 서프라이즈를 염려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조금 더 냉철하게 들여다보면 10월의 깜짝 미북정상회담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몇 달도 남지 않은 트럼프 행정부와 합의를 서두르기보다는 핵·미사일 능력을 계속 강화하고 10월10일 당 창건 75주년 기념일에 신형 ICBM도 슬쩍 보여주면서 몸값을 올리는 게 낫다고 판단할 수 있다. 지난 30년간 북한은 한국과 미국의 새 정부가 들어서는 시기를 전후해 큰 도발을 하고 긴장을 고조시킨 후 유리한 위치에서 협상을 시작하는 전략을 구사해왔다. 북한은 이번에도 미 대선 후 이 오래된 수법(old playbook)을 다시 꺼내 들 가능성이 크다. 미국의 입장에서도 북한과의 섣부른 비핵화 스몰딜 합의가 과연 약이 될지, 독이 될지 알 수 없는 리스크가 있다. 무엇보다 역대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외교 이슈가 결정적 역할을 한 적이 없으며, 이번에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요즘 미국에서 나오는 얘기를 보면 옥토버 서프라이즈는 북핵이 아니라 코로나19 백신일지 모른다. 성급한 백신 투여가 안전성과 효과를 보장하지 못하듯 설익은 비핵화 합의는 대한민국과 세계의 안보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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