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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아침에] 한진해운과 하이닉스의 엇갈린 운명

김영기 논설위원

美·日 등 제조업 인프라에 막대한 투자

정부가 나서 산업 패권전쟁 준비하는데

우린 집권위해 돈으로 선심 쓸 궁리만

한진해운의 악몽 재연될까 두렵지 않나





하이닉스반도체(현 SK하이닉스)가 생사의 기로에 섰던 2002년 1월 20일. 서울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에서 마주한 이연수 여신담당 부행장의 눈은 잔뜩 충혈돼 있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실핏줄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사흘 후 미국 마이크론과의 매각 협상을 위해 떠나야 했지만 좀처럼 내키지 않았다. 하이닉스의 생존을 장담할 수는 없을지언정 마이크론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헐값을 넘어 굴욕이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방미 협상 과정에서 이런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그는 결국 석 달 후 건강 등의 이유를 들어 매각 서명을 위한 최종 협상단에는 따라가지 않았다. 그의 뜻이 통한 것일까. 하이닉스 이사회는 해외 매각안을 부결시켰다. 대한민국의 효자 기업이 된 SK하이닉스는 이런 가시밭길을 걸으며 만들어졌다.

창업(創業)보다 수성(守城)이 어렵다고 하지만 한 나라의 대표 기업으로 영속하는 것은 몇 곱절 더 힘들다. 산업 논리뿐 아니라 금융·정치 논리에 우리처럼 강대국 틈에 낀 국가의 기업에는 헤게모니 논리까지 개입된다. 오죽하면 대우 해체 배경으로 서방의 음모론이 나왔을까. 하이닉스는 지켜냈지만 우리는 주력 기업 하나를 허무하게 날렸다. 세계 7위의 해운 선사인 한진해운이 금융 논리로 허무하게 공중분해된 것이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현대상선(현 HMM)이 오늘날 대박을 터뜨리는 것을 보면 한진해운의 해체가 더욱 아프다. 한진해운처럼 금융 논리로 무너질 위기에서 벗어나 수주 잭팟을 터뜨린 대우조선을 보며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

전 세계 산업 패권 전쟁의 한복판에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본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제조업 부활 작업들을 보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투박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달리 바이든은 노련한 투우사처럼 중국은 물론 동맹국까지 어르고 달랜다. 중국에 맞서 글로벌 공급망을 다시 짜겠다고 하더니 미국의 상징인 자동차 산업이 반도체 부족으로 휘청이자 다른 나라 기업인 삼성전자까지 불러들인 자리에서 웨이퍼를 손에 들고 “미래의 인프라를 만들 것”이라고 외쳤다. 재탕으로 얼룩진 한국판 뉴딜과 달리 그는 2조 달러가 넘는 천문학적 인프라 계획을 짜면서 첨단 산업 육성을 먼저 내걸었다. 중국의 추격만을 두려워하던 우리 기업에 머지않아 가장 큰 적은 미국이 될 것이다. 거대한 시장과 외교적 파워를 등에 업은 미국 기업들이 덤벼드는 순간 중국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공세가 이어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전자인들 생존을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일본의 변신은 더 두렵다. 30여 년 전 일본 기업들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NEC·도시바·히타치 등은 반도체 시장을 휩쓸었고 조선(造船)은 일본의 독무대였다. 한국·대만의 추격과 중국의 저가 공세, 여기에 투자가 늦어지며 제조업 강국의 자리를 물려줬지만 그들의 저력은 여전하다. 히타치가 비주력 사업을 팔고 일본 전자 업계 최대 규모(96억 달러)로 미국 소프트웨어 기업인 글로벌로직을 인수한 것은 부활의 상징이다. 대형 조선사 합병으로 올 1월 출범한 ‘니혼조선’은 우리 조선사의 목을 조일 것이다. 게다가 종신고용제와 연공서열제 등 조직 문화까지 송두리째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중국은 샤오미·화웨이·바이두 등이 줄줄이 전기차 진출 등 변신을 서두르며 미국에 맞서고 있다. 느긋하던 유럽연합(EU)마저 자동차와 반도체 등의 패권을 쥐겠다고 나섰다.

오랜 세월 우리는 “중국과의 기술 격차가 몇 년”이라는 등식에 사로잡혀왔다. 중국의 추격만 걱정했지 선진 기업들이 다시 부활해 우리를 공격해올 것은 걱정하지 않았다. 이제 산업 패권 전쟁은 제조업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우리를 새로운 경쟁의 틀로 몰아넣고 있다. 우리의 대통령과 지도자들은 격동의 순간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가. ‘제조업 육성 특별법’을 서둘러야 한다고 나설 지도자가 한 명이라도 있는가. 세계는 미래 주도권을 쥐려 무서운 게임을 이어가는데 우리 지도자들은 권력을 쥐기 위해 돈으로 선심 쓸 궁리만 하니 한진해운의 악몽이 되풀이될까 두렵기만 하다.

/김영기 논설위원 yo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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