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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 '화석 연료 콘센트'에 안 맞는 '그린 전기 플러그'

[그리드(The Grid)-그레천 바크 지음, 동아시아 펴냄]

전력 시스템 전반 지칭 '그리드'

석탄·석유 등 기반 대부분 낙후

재생 에너지 사용엔 맞지 않아

기후 변화 등 효과적 대응 못해

생산·소비 맞는 인프라 개혁 강조

지난 2003년 8월14일(현지시각)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시작된 정전은 미 동북부 8개주와 캐나다 일부 주를 강타, 6,180만㎾의 전력 공급 중단으로 3일간 암흑 세계를 가져 왔고, 5,000만 명에게 피해를 입혔다. 사진은 블랙아웃 첫날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시내 스카이라인의 모습/AP=연합뉴스




2003년 8월, 미국과 캐나다 동부 일대에 최악의 정전사태가 발생했다. 사흘 간 암흑천지가 이어지면서 도시의 모든 활동이 마비됐고, 8개 주의 5,000만 명이 피해를 봤다. 추산된 손실만 60억 달러. 전력 시스템의 노후화로 배전망 네트워크에 부하가 걸렸고, 불안정한 고압 송전선에 웃자란 나뭇가지가 닿으면서 대규모 정전으로 이어진 것이다. 세계 최고의 첨단 기술력을 자랑하는 미국이지만, 낡은 설비 탓에 벌어지는 정전은 매년 늘고 있다. 2001년 15건이던 중대 정전 사태는 2007년 78건, 2011년 307건으로 늘었다. 한 조사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어느 날이든 약 50만 명의 사람들이 2시간 이상 전력을 공급받지 못하는 일이 벌어진다고 한다. 더 심각한 것은 낙후된 설비에서 ‘미래 에너지’라 불리는 재생 에너지를 돌릴수록 전체 전기 시스템이 파괴되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체질을 안 바꾸면 백약이 무효하고, 심을 땅이 별로면 제아무리 좋은 씨앗도 의미 없는 법이다. ‘녹색 에너지’라는 플러그를 ‘화석연료’라는 콘센트에 끼우면 돌아오는 것은 ‘고장’일 수밖에 없다.

‘그리드’의 저자 그레천 바크는 19세기 화석연료 시대의 전기 그리드를 손보지 않고 ‘미래 에너지’라 불리는 재생 에너지를 가동하는 것은 의미 없고, 오히려 기존 전기 그리드를 파괴하는 결과만 초래한다고 경고한다.


신간 ‘더 그리드’는 에너지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인프라의 체질 개선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서 ‘그리드(grid)’는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설치된 선로와 관련 시스템 전반을 의미한다. 저자는 재생 에너지의 확장은 그리드를 전면적으로 재구성해야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지금 우리는 재생 에너지를 돌릴 그리드를 갖추고 있지 않다. 20세기의 그리드는 석유, 석탄, 플루토늄, 천연가스에 맞춰 건설됐기 때문이다. 그리드를 바꾸지 않고서는 에너지 시스템을 개혁할 수도 없고, 기후 재앙에 대비할 수도 없다는 게 책의 핵심이다. 저자는 1800년대 후반부터 미국 전기 그리드의 역사를 정리하며 오늘날의 그리드가 지닌 문제를 진단하고 21세기 전기 인프라 혁명의 전개 방향을 가늠해본다.

경쟁력을 잃은 오늘날 전력 산업의 문제의 뿌리는 ‘장기 독점’에서 찾을 수 있다. 정부와의 결탁으로 독점적 지위를 보장받아 온 유틸리티 회사들이 ‘경쟁 없고 발전 없는’ 시장을 방치해 왔다.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는 독점적 지위 덕분에 지속적으로 수익을 증가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주어진 것을 그저 가동할 줄만 알았던’ 이들은 창의성·유연함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시대의 흐름을 읽고 이에 대비하는 작업에서 손을 놓았다. 1996년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FERC)가 경쟁촉진조치로 ‘명령 888’(Order 888)을 발표하고, 2002년 에너지 정책법을 통해 전기 도매 시장의 완전한 경쟁을 도입했지만, 상황은 더 나빠졌다. 전력 회사들은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분야(발전 시설)에만 집중한 채 정작 안정적인 전력 시스템을 등한시했고, 그리드의 취약함은 오히려 심해졌다.





책은 그리드를 둘러싼 새로운 움직임을 소개하며 개혁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대표적인 것이 ‘마이크로 그리드’다. 마이크로그리드란 일반 발전소와 달리 태양열이나 풍력 같은 독립된 분산 전원으로부터 소량의 전력을 생산·저장·공급하는 시스템이다. 과거 미국에 존재했지만, 전기 기업의 독점화가 이어지며 퇴색한 방식이다. 2012년 10월 대서양 중부를 강타한 초강력 폭풍 샌디로 인해 일부 지역의 전기가 최장 한 달간 끊긴 적이 있다. 그런데 이 난리 속에서도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캠퍼스는 1시간의 정전 이후 일상을 되찾았다. 열병합 발전으로 에너지를 얻는 마이크로그리드를 통해 기숙사는 물론 캠퍼스 경찰서, 의료 센터에 전력을 공급했기 때문이다. 2015년 기준 미국은 300여 개의 마이크로그리드를 보유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재생 가능한 연료를 사용해 전기를 생산한다. 비상시에는 자율적으로 작동하지만, 평상시에는 대형 그리드와 연결돼 이들이 생산한 전기를 대형 그리드 소비자들도 이용할 수 있다. 유연한 연결 시스템으로 그리드의 부하를 줄이고 생산과 소비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책은 대부분의 미국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다른 나라의 사정은 곧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시점이 2010년대 중반으로 미국의 전력 산업 변화가 우리보다 10년 정도 앞서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리드 개혁은 그저 남의 나라 이야기도, 먼 미래의 문제도 아니다. 책을 번역한 기후·환경·에너지 전문가 3인은 “한국은 이제 한국의 이익만 노리며 움직일 수 없게 됐고, 국제 사회의 움직임을 선도할 책임을 지게 됐다”며 그리드 개혁 논의를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한다. 2만 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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