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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 취지·인프라 고려땐 서울이 최적"…부산·대구선 "또 지방 홀대"[이건희 기증관]

■'이건희 기증관' 서울에 건립…지자체는 반발

문체부 "접근성·국익 따져서 결정"

중앙박물관·현대미술관 연계 필수

서울 건립 '최선의 선택' 밝혔지만

지자체는 "공청회·토론회 한번없이

정부서 일방적으로 결정했다" 분노

21일부터 특별전·내년엔 지방순회

‘이건희 기증관’ 후보지로 오른 국립현대미술관 인근 송현동 부지(왼쪽 사진)와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부지(오른쪽 사진). /권욱 기자






지난 4월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유족 측이 막대한 규모의 문화재와 미술품을 국가에 조건 없이 기증한 후 전국민적 관심을 모았던 ‘이건희 기증관’ 건립지는 결국 서울용산과 송현동 중 한 곳으로 정해지게 됐다. 이 회장의 컬렉션 철학과 기증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기증품을 한 곳에 둬야 하고, 기증품 조사와 연구, 보존 처리와 전시·교류를 위해서는 전문 인력과 시스템을 갖춘 국립중앙박물관이나 국립현대미술관 인근 지역이 건립 최적지라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다. 미술계도 “현실적인 고민이 반영된 결정”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지역 균형 발전 등의 이유를 들어 ‘이건희 기증관’ 유치에 나섰던 지방자치단체들은 절차 상의 문제를 제기하며 정부 결정을 수용하기 힘들다고 반발했다. 정부가 지역의 문화 향유권 보장을 위해 지역 문화 시설 확충과 순회 전시 등을 약속하기는 했지만, 기증관 건립지 결정 과정에서 공청회나 공모 같은 최소한의 지역 의견 수렴 과정조차 거치지 않았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렵게 됐다.

황희 문체부 장관이 7일 정부 서울청사 별관에서 국가기증 이건희 컬렉션 활용 방안을 발표하고 있다,/연합뉴스


겸재 정선에서 이중섭, 모네까지 방대한 기증품


7일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국가에 기증 된 ‘이건희 컬렉션’은 문화재와 미술품을 모두 합해 2만 3,181점에 달한다. 이 중에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 216호), 단원 김홍도의 ‘추성부도’(보물 1393호), 이중섭의 ‘황소’,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 등 귀한 작품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 이에 이 회장 유족 측의 기증 결정이 알려진 이후 관리 및 전시 방안 등이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이에 관련 주무부처인 문체부는 기증품 활용 방안 마련을 위해 별도 전담팀과 관련 전문가로 구성된 국가 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위원회(위원장 김영나)를 구성, 10차례 논의를 거쳐 주요 원칙과 단계별 활용 방안을 마련했다.

위원회가 정한 활용 방안은 크게 네 가지다. ▲국민의 문화향유기회 확대를 위한 국가기증의 취지 존중과 기증의 가치 확산 ▲문화적 융·복합성에 기초한 창의성 구현 ▲전문인력 및 국내외 박물관과의 협력 확장성 ▲문화적·산업적 가치 창출을 통한 문화강국 이미지 강화 등이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수집해 유족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국보 제216호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컬렉션 철학 살려 기증품 한 곳에 모으기로


김영나 위원장은 “(컬렉션에는) 석물, 도자기, 유화 등 다양한 미술품들이 있는데 이들 작품을 보존·관리하고 전시하기 위해서는 서울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현대미술관 경험과 인력이 필요하고, 국립중앙도서관과 협력해야 하는 부분도 있다”며 “기증품이 서울에 있어야 원활하게 업무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 위원장은 “접근성 면에서도 송현동과 용산이 최적”이라며 “이 두 지역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인근에 있고, 미술관은 도심에 있어야 한다는 게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또 김 위원장은 “두 지역 중에서는 송현동이 더 장점이 많다”는 개인적 의견도 밝혔다. 아울러 고미술과 근현대미술을 분리하지 않고, 한 자리에 모아 전시하기로 한 데 대해서는 “기증자의 취지를 살리고, 기증 문화를 활성화하는 방안”이라고 설명했다.



건립 시기는 확정하지 않았다. 다만 방대한 기증품에 대한 등록과 기초 조사가 끝나는 시점이 2026년 정도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기증관 최종 건립지는 연내에 확정하고, 완공은 2027년 이후 가능할 것이라는 게 대략적인 문체부의 예상이다. 또 건립 비용으로는 1,000억원 정도가 들 것으로 추산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창원관 유치추진위원회가 7일 창원시청 앞에서 이건희 기증관 서울 건립 결정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부산·대구·세종·창원 등 지자체 “서울 중심주의”


문체부는 기증관 건립지가 서울로 결정되기는 했지만 지역 문화 시설 확충과 순회 전시 등을 통해 전국 각지에서 이건희 컬렉션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우선 오는 21일부터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기증품 특별전을 열고, 내년 하반기부터 연 3회 이상 지역별 대표 박물관·미술관 순회 전시를 추진하기로 했다.

하지만 부산, 대구, 세종, 창원 등 지자체들은 문체부 발표에 큰 실망감을 드러냈다. 박형준 부산시장은 “공청회나 토론회 한 번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해버렸다”며 “지역 국민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지역 무시와 오만 행정의 극치”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권영진 대구시장도 “서울 집중화 현상이 심각한데 기준과 절차, 원칙도 없이 결정하는 것은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미술계는 기증관 입지에 대해서는 ‘현실적인 고민이 반영된 결정’이라는 평가했다. 양정무 한예종 미술원 교수는 “이건희 컬렉션의 기증 기관이 국립중앙박물관·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위치(서울)에서 벗어나 제3의 지역에 기념관을 짓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이번 이슈를 계기로 지역 박물관·미술관 활성화를 위한 인프라 확충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양 교수는 “우리나라 미술 인프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최하위 수준”이라며 “앞으로 중요한 건 지역 미술 활성화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와 콘텐츠 발굴·지원”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대전시립미술관장을 지낸 박일호 이화여대 교수는 “자치단체장들의 정치적 관점에서 논의가 가열된 상황에서 ‘어느 지역’이 아닌 서울을 선택함으로써 지역의 비난을 피하려고 한 측면도 있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후보지를 서울로 결정한 이유로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의 경험과 인력, 접근성을 꼽았는데 이는 오히려 유치전 과정에서 각 지역이 내세운 ‘지방 문화 홀대’를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다”며 “설득력 면에서는 아쉬움이 크다”고 전했다.

입지를 떠나 ‘시대, 동서양, 분야를 망라’하는 ‘이건희 기증관’의 형태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국립근대미술관을 원하는 사람들의 모임’ 공동간사인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기증품을 한곳에 모은 ‘통합 전시관’이라는 발상은 이미 전문가들이 말이 안 된다고 수차례 지적해 온 부분”이라며 “지역에 이미 기증한 것을 다시 가져오는 절차도 절차지만, 향후 이 작품들을 한데 모아 제대로 연구할 수도 없다”고 꼬집었다. 이어 “통합전시관 형태로 기증품을 모두 모아 늘어놓을 경우 그 전시관의 성격이 박물관인지 미술관인지부터 시작해 효율적인 운영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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