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릭 컬렉션(The Frick Collection)은 펜실베니아주 피츠버그에서 철강사업을 하던 헨리 프릭 (Henry Frick·1849~1919)에 의해 설립됐다. 피츠버그는 19세기 당시 세계 철 생산량의 대부분을 차지한 도시였다. 프릭은 철강 부호 엔드류 카네기와 파트너십을 맺으며 큰 성공을 거뒀다. 1892년 발생한 카네기 철강 회사의 파업사태가 프릭의 회사에도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프릭은 파업 사태 기간에 암살 시도도 경험하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갖게 됐다. 고뇌의 시간 동안 프릭은 예술에 관심을 가지며 컬렉터로서 미술품들을 수집하였다. 그의 사망 후에는 자녀들이 ‘프릭 컬렉션’의 임원으로서 미술품 수집을 이어갔다.
1935년 프릭 컬렉션이 대중에 공개됐다. 소장품을 전시한 미술관이 피츠버그와 뉴욕에 각각 자리잡고 있다. 프릭 컬렉션은 미국 내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우수한데, 르네상스·중세·근대 시대의 조각품·회화·도자기·가구 등이 포함돼 있다. 최근에는 뉴욕 센트럴파크 바로 옆에 위치한 미술관이 리모델링에 들어가면서 지난 3월 어퍼 이스트에 있는 945 메디슨 애비뉴에 있는 건물을 2년간 임대해 ‘프릭 매디슨(Frick Madison)’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
임대지만 이 건축물은 예술과 유서가 깊다. 바우하우스의 디자인 철학에 영감을 받은 건축가 마르셀 브루어(Marcel Breuer·1902~1981)가 1966년 설계한 곳인데, 브루어 빌딩이라고도 불린다. 휘트니미술관이 미트패킹 지역에 새 건물을 신축한 2014년 이전까지 50여 년간 이 곳에 있었다. 2016년부터 4년간은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이 임대해 사용했다. 브루어는 건축물 주변 거리의 활기가 예술의 심오한 세계로 전환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콘크리트를 재료로, 창문도 거의 없는 밀폐된 공간으로 디자인 돼 주변 거리 풍경과는 사뭇 다른 엄숙한 분위기를 지닌다.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이 나가고 난 후 새롭게 개관한 프릭 매디슨은 그간 공개되지 않았던 작품들을 대거 선보였다. 전시장 2층은 북유럽, 3층 이탈리아와 스페인, 4층 프랑스와 영국 식으로 작품이 탄생한 국가별로 나뉘어 소개됐다. 4층 프랑스관에서는 마네·드가·르누아르 등 프릭이 초기에 수집한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의 회화들이 있고, 3층 이탈리아와 스페인관에는 벨라스케스와 고야의 회화들이 전시돼 있으며,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유럽과 아시아 도자기들이 벽화처럼 걸려있다. 아시아 도자기 문화의 영향을 받은 18세기 유럽 메이센 공방 도자기들도 포함돼 있다.
뉴욕 프릭 메디슨에서는 특히 2층 북유럽 갤러리가 인상적이다.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 반 레인(1606~1669) , 얀 베르메르(1632~1675)와 벨기에 화가 안토니 반 다이크(1599~1641) 같은 거장들의 ‘책에서 볼 법한’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나란히 3점 걸린 렘브란트의 초상화들은 캔버스 내에서 얼굴과 손과 같이 노출된 신체를 제외한 부분이 어두운 갈색 계열의 색감으로 어둡게 처리돼 있다. 명암의 대조로 얼굴의 표정과 손의 포즈가 마치 살아있는 인체를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베르메르의 방에는 설립자 프릭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구입한 그림인 1667년작 ‘주인과 하녀(Mistress and Maid)’가 걸려 있다. 베르메르 특유의 정갈함과 차분함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루벤스의 제자로 알려진 벨기에 화가 반 다이크의 초상화는 무려 9점이나 전시 중이다. 루벤스의 인물이 넘치는 생명력을 특징으로 갖는다면, 반 다이크의 인물은 상대적으로 힘이 빠져있으나 섬세한 표현력이 두드러진다. 갤러리에 전시된 ‘제노바의 귀부인’은 여인이 입은 비단 재질의 하얀색 드레스에 수 놓인 금색 장식들이 하나씩 다 표현돼 있다. 드러난 얼굴과 손은 창백하게 보일 정도로 순백의 색으로 칠해져 있다. 그리고 뒤에 배경에는 붉은색 계열의 벨벳 커튼이 인체의 배경으로 놓여 있어 순백과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프릭 매디슨은 2년의 단기 임대 계약으로 2023년 3월까지 자신들의 컬렉션을 전시할 예정이다. 뉴욕 도심에서 현대 미술과 다른 정통 유러피안 미술품들을 경험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뉴욕=엄태근 아트컨설턴트
※필자 엄태근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를 졸업하고 뉴욕 크리스티 에듀케이션에서 아트비즈니스 석사를 마친 후 경매회사 크리스티 뉴욕에서 근무했다. 현지 갤러리에서 미술 현장을 경험하며 뉴욕이 터전이 되었기에 여전히 그곳 미술계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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