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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나와 닮은 얼굴 찾아드립니다





또 한잔 마신다. 침묵은 술병에도 있다. 꽉 차 있는데도 아무것도 안 하고 점잔 빼고 있는 것의 으뜸은 병(甁)이다. 이렇게 마시다보면 술병 속 침묵의 무게를 마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오랫동안 바라본 것을 닮는다. 내가 죽을 때 바다를 닮은 얼굴이 되어 있다면 좋겠으나 그렇게 될지는 모르겠다. 최소한 빈 술병이라도 닮기를 희망한다. 당신은 어떤가. 혹시 비씨카드나 돈의 얼굴을 하고 죽을 수도 있다고 상상해본 적 없으신가. (한창훈, ‘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 2014년 문학동네 펴냄)





한창훈 작가는 거문도에서 태어나 지금도 그곳에서 글을 쓴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감옥’에서 그는 글을 쓰고 종종 소주를 마시고 바다와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도시 사람들에게 바다는 휴가철에 몰려가서 ‘구경’하는 곳이지만 그와 이웃들에게 바다는 매일 ‘살아가는’ 곳이다. 그래서 그는 1년 중 어느 계절의 바다가 가장 아름다운지를 알고 있다. 그가 수십 년을 바라본 바에 따르면 바다는 11월에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유난히 파랗고 깊어 “한 바가지 떠다 끓이면 푸른 결정체라도 나올” 듯한 바다다. 그러나 찬바람 거세지는 11월의 바다는 정작 한적하다.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바다는 평생 못 본 채 휴가철 인파에 떠밀려 바다의 한 조각만 간신히 보고 돌아오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오랫동안 바라본 것을 닮는다”는 말은 서늘하게 마음을 찌른다. 한창훈 작가는 바다를 닮지 못한다면 빈 병이라도 닮겠노라 썼는데, 나는 과연 무엇을 닮게 될까. 내 삶과는 무관한 잡다한 광고와 영상들이 쏟아져 나오는 컴퓨터나 휴대폰 화면을 닮게 되는 건 아닐까. 사람의 온기와 생기는 잃고 각종 모니터의 블루라이트에 창백해진 채, 숫자와 글자만 빼곡히 박힌 서류철을 닮게 되지나 않을까. 당신이 살면서 가장 오래 바라본 것은 무엇인가. 내가 바라보는 것이 내가 된다. /이연실 문학동네 편집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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