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이 반도체를 국가 전략 자산으로 인식하며 경쟁적으로 투자와 인센티브를 늘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10~20년간 이런 흐름이 계속될 것입니다.”
반도체 초미세공정 장비 분야의 독보적 기업으로 꼽히는 네덜란드 ASML의 피터 베닝크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9일 열린 ‘세미콘 코리아 2022’에서 반도체 공급 부족 현상을 1970년대 원유 파동에 빗대며 이같이 전망했다.
모든 제품의 전자·네트워크화가 빠르게 진행되며 반도체는 한 산업 분야가 아닌 국가 안보의 핵심 축으로 떠오르고 있다. 다행히 한국은 세계 반도체 1위인 삼성전자를 보유한 반도체 강국이다. 그러나 반도체 패권을 둘러싸고 각국이 전력을 다하는 와중에도 정부와 국회는 그저 대기업과 기득권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지원은 머뭇거리면서 각종 규제만 연일 쏟아내고 있다. 반도체뿐만 아니라 디스플레이와 자동차·배터리 등 국가 경제를 이끌어온 주력 사업이 처한 현실도 다르지 않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적극적인 규제 개선 노력으로 기업 투자가 활성화될 수 있는 시장 여건 조성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각자도생 떠밀리는 반도체·디스플레이
10일 재계 등에 따르면 오는 6월 시행을 앞둔 ‘첨단 전략산업 경쟁력 강화 및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반도체특별법)’을 두고 업계 안팎에서는 ‘아쉽다’는 평가가 잇따른다. 기술 인력 양성을 위한 핵심 요청 사항인 수도권 대학 정원 문제를 담지 못했고 설비투자에 대한 세제 혜택도 업계가 요청한 최소 25~50%에 한참 못 미치는 6~16% 세액공제에 그쳤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일본이 막대한 인센티브안을 경쟁적으로 내놓는 것과 대조적이다. 지원은커녕 자기자본으로 투자를 늘리려 해도 발목을 잡히기 일쑤다. SK하이닉스는 2019년 2월 경기도 용인시에 반도체클러스터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지만 제도 정비와 지방자치단체와의 협의 등에 지연이 반복되면서 3년째 첫 삽도 못 떴다.
중국에 쫓겨 액정표시장치(LCD) 시장을 이미 내주고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분야에서 사활을 걸고 있는 디스플레이 업계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디스플레이 업계는 반도체특별법과 마찬가지로 디스플레이 지원 법안을 기대했지만 최종 제외되며 연구개발(R&D)에 대한 추가 지원은 요원하다. 2020년 중국에 밀려 글로벌 디스플레이 세계 1위를 내준 국내 업계로서는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중국의 OLED 추격을 따돌릴 우군을 잃은 셈이다. 남상욱 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중국 기업은 정부의 지분 투자와 은행 대출로 손쉽게 설비 확장에 나서고 있다”며 “한국은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중국을 견제할 유일한 국가로 반도체와 배터리처럼 포괄적 지원 체계 구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대학정원 규제에 우수 인재 태부족
반도체와 배터리, 자율주행과 전기차 등 핵심 산업의 미래를 담당할 인력 부족 문제도 심각하다. 전쟁에 쓸 무기와 장비가 있어도 이를 맡을 군인이 없는 것과 같다. 반도체의 경우 해마다 배출되는 반도체 설계 분야 석·박사 인력은 100~150명에 불과하지만 수요는 1000명을 웃돈다. 결국 인력 확보에서 밀리는 중소기업은 베트남과 스리랑카·인도 등 해외에서 인력을 구하고 있다.
배터리 분야도 석·박사급 연구·설계 인력은 1013명, 학사급 공정 인력은 1810명가량 부족한 것으로 추산됐다. 자동차 업계도 자율주행과 전기차에서 인력 부족이 심각하다. 연간 4600명가량의 인력이 충원돼야 하지만 내년 기준 양성 가능한 인력은 연간 2300명에 그친다.
특히 미래차 부문의 핵심으로 꼽히는 소프트웨어 분야는 고질적인 인력 부족으로 시름에 잠겨 있다. 이항구 한국자동차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미국과 한국의 자동차 생산 대수는 2.5배 차이를 보이는데 차량용 소프트웨어 인력은 미국이 2만 8000명, 한국은 1000명으로 비교조차 불가능한 수준”이라며 “전문 인력 확보에 대한 고민이 선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수도권 지역의 대학 정원 제한을 풀고 연구개발(R&D)에 대한 장기적 투자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인력 양성의 키를 쥔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얘기다. 마티아스 코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사무총장도 같은 맥락에서 “산업 대전환을 위해 양질의 교육을 정부가 제공해야 한다”며 “산학 연계와 기초연구 투자로 풍부한 혁신의 생태계를 만들 때 한국이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성장 발목 잡는 뭉텅이 규제
기업의 미래 성장을 위한 제도적 지원이나 물적 인프라는 빈약한 가운데 정부와 국회를 중심으로 규제는 계속 늘고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의 2019년 국가경쟁력 평가에서 한국의 ‘정부 규제 부담’은 87위로 방글라데시(84위)나 에티오피아(88위) 등과 비슷했다. 정부가 시장을 돕기는커녕 발목만 잡는다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다. 특정 사건만 발생하면 입법안이 뚝딱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정우용 한국상장회사협의회 정책부회장은 “이사회 독립성을 위해 사외이사 임기를 6년으로 제한했더니 회사마다 사외이사 구인난으로 나타났다”며 “기업은 자율에 맡겨야 하는데 정부가 자꾸 관여하면서 엉뚱한 결과를 낳는다”고 비판했다.
최근 물적 분할에 따른 소액주주의 피해가 이슈로 떠오르자 여야를 막론하고 이를 막겠다는 논의가 나오는 점도 이전과 다르지 않다. 자칫 기업의 신산업에 대한 투자 의지만 꺾는 의도치 않은 결과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태기 단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소액주주 등 투자자에 대한 보호 장치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나 관련 이슈가 급부상할 때마다 과유불급식으로 논의가 진행되는 것은 문제”라며 “글로벌 기준에 맞춘 합리적인 제도 개선이 논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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