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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감탄하고 가까이서 한번더 경탄하는…거스키 국내 첫 개인전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안드레아스 거스키'

37년 작업 관통하는 40여점 대표작

신작 2점은 세계 최초 공개

이미지 조작으로 이룬 수평·수직 구도

사진을 현대미술사의 일부로 끌어올려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31일 개막하는 안드레아스 거스키의 국내 첫 개인전에 출품된 1999년작 '99센트' /조상인기자




잘 정리된 선반 위에서 초콜릿과 쿠키, 껌과 쥬스, 세제와 향신료 등이 알록달록한 색으로 반짝이고 있다. 각각의 상품들은 구체적인 상표까지 보일 정도로 아주 선명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물건 하나하나가 마치 “나를 뽑아줘”라고 외치듯. 독일이 낳은 현대사진의 세계적 거장 안드레아스 거스키(67)의 대표작 ‘99센트’(1999)다. 슈퍼마켓의 매대를 촬영한 이 사진 속에는 물론 사람도 존재한다. 하지만 대량 소비사회의 산더미같은 물품 속에서 인간의 삶이 오히려 압도당해버린 양, 사람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사진은 렌즈가 갖는 곡면의 성질 때문에 가장자리가 휘거나 흐릿해지는데, 거스키는 여러 곳에서 찍은 사진을 합성·조작해 수평과 수직이 반듯반듯한 특유의 화면을 구성한다. 각각의 선반을 따로 찍어 이어붙이면서 원근법마저 없앴고, 배경의 색채도 눈에 띄지 않게 처리함으로써 매대의 물품만이 부각돼 ‘소비문화’를 상징하게 했다. 거스키의 대표작인 ‘99센트’는 지난 2007년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약 33억원에 낙찰돼 당시 현대사진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이후로도 작품 가격은 꾸준히 상승했고, 2011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라인강Ⅱ’(1999)가 당시 환율로 약 49억원(430만달러)에 팔렸다.

안드레아스 거스키의 ‘라인강 III’/ 사진제공=스푸르스 마거스·아모레퍼시픽미술관


스타작가 거스키의 대표작 총망라


거스키의 국내 첫 대규모 개인전이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3월31일 개막했다. 대표작 ‘99센트’를 포함해 작가의 37년 작업을 전반적으로 보여줄 40여 작품을 선보였다. 현대사진의 스타산실인 독일 ‘베허학파’의 일원이던 그를 유명작가 반열에 올려놓은 ‘파리 몽파르나스’(1993)도 만날 수 있다. 파리 최대 규모의 아파트 750가구를 완벽한 수평·수직 구도 속에 담은 작품이다. 너무나 현실적인 아파트의 모습이지만 똑같은 크기로 격자무늬를 이룬 창문들이 비현실적 느낌을 준다. 역시나 오리고 이어붙이는 과정을 통해 주변부가 휘고, 초점에서 벗어난 장면이 흐릿해지는 것을 보완했다. 창문 안쪽으로 벽지,조명,사람들의 움직임까지 발견할 수 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우혜수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부관장은 “이 거대한 수평·수직의 구조는 끊임없이 확장돼 갈 것만 같은데, 개인이 저항할 수 없는 삶의 견고한 구조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기에 의미심장한 작업"이라며 “거스키의 작품은 사진이지만 추상적인 변화를 시도했고 성과를 이뤘다”고 평했다.

안드레아스 거스키의 '파리, 몽파르나스' /조상인기자


거스키가 지난 2007년에 직접 평양을 방문해 촬영한 ‘평양’ 시리즈도 선보였다. 북한의 최대 행사 중 하나인 아리랑축제의 매스게임 장면을 촬영했는데, 공산주의의 체제 선전은 완전히 배제한 채 10만명이 넘는 공연자 개개인에게 초점을 맞췄다. 가까이서 보면 그 얼굴을 일일이 확인할 수 있을 정도다. 거스키의 ‘평양’ 시리즈는 리움미술관의 상설전시를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다.

안드레아스 거스키의 '평양 VI' /사진제공=아모레퍼시픽미술관




사진을 현대미술로 끌어올린 거스키


거스키 작품의 또다른 매력은 미술사를 자신의 작품 속으로 끌어들였다는 점, 현대사진의 추상표현주의를 이뤄냈다는 점이다. ‘파리 몽파르나스’에서 추상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 ‘컬러차트’를 떠올릴 수 있으며, ‘라인강’ 연작에서는 바넷 뉴먼의 추상화를, 드넓은 튤립 꽃밭을 항공사진으로 촬영한 작품에서는 마크 로스코의 여운을 감지할 수 있다.

2005년작 ‘바레인’은 일필휘지의 검은 먹선을 보는 듯하나 가까이 들여다보면 자동차경주(F1)용 아스팔트 도로를 손보는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다. 굵은 검은색 선(線)이 산유국 부(富)의 근원임을 은유했다. 멀리서는 장대함이 느껴지는 추상화의 미감에 감탄하고, 가까이 다가가서는 비로소 눈에 들어온 사람·물품·꽃잎 등에 경탄하느라 작품 앞에서 물러났다 다가서기를 반복하는 관객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가는 검은 선의 율동감을 아스파라거스 밭에서 찾아낸 ‘벨리츠’(2007), 진분홍 색띠의 반복을 튤립밭에서 발견한 ‘무제ⅩⅨ’(2015) 등이 그렇다.

우혜수 부관장은 “거스키의 끝까지 이어진 수직·수평 구도는 인류가 극복할 수 없는 사회적 구조, 자본주의의 장벽을 상징한다”면서 “대상이 중요하다기 보다는 어떤 구조와 구성에서 드러나는지가 중요하고, 멀리서 뿐만 아니라 가까이서 디테일을 살펴보며 거시구조와 미시구조를 함께 음미해야 한다”고 권했다.

안드레아스 거스키의 2015년작 ‘무제ⅩⅨ’ /사진제공=스푸르스 마거스·아모레퍼시픽미술관


안드레아스 거스키의 2015년작 ‘무제ⅩⅨ’ 의 세부.


이번 전시에서 챙겨봐야 할 작품은 세계 최초로 공개된 2점의 신작이다. 2021년작 ‘얼음 위를 걷는 사람’은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터 브뤼겔의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의 한복판에서 촬영한 그의 작업실 근처 라인강변의 모습인데, 방역지침인 ‘거리두기’에 신경 쓰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특유의 패턴을 이뤘다. 사실 이번 전시는 2018년부터 준비를 시작해 2020년에 열릴 예정이었지만 코로나의 세계적 대유행으로 2년이나 미뤄졌다.

안드레아스 거스키의 2021년작 '얼음 위를 걷는 사람(Eislaufer)' /사진제공=스푸르스 마거스·아모레퍼시픽미술관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은 건축 거장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설계한 용산 사옥의 지하1층에 자리잡아 아모레퍼시픽의 문화적 기반을 상징한다. 예술을 애호하고 후원하는 아모레의 기업정신은 서성환(1923~2003) 태평양화학 창업주에게서 시작됐고, 이를 물려받은 서경배 회장의 안목과 영향력은 ‘세계 200대 컬렉터’에 꼽힐 정도다. 서 회장은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은 미와 영감이 가득한 창의적인 소통의 공간으로 거듭나기를 목표한다”면서 “이번 전시를 통해 사진이라는 장르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인식하고, 한국 예술계에 영감을 주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8월14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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