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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 “尹, 대선 때 과학기술 중심 국정 표방…집권 후 실천 로드맵 안 보인다”

◆새 정부 과학기술 R&D 예산 실제론 뒷걸음질

과기 R&D예산 증가율 두자릿수에서 내년 1.7%로 급감

기초연구 제자리걸음…출연연 예산 증가율도 2% 불과

산학연, 대선 때 내세웠던 '과학기술강국’ 비전 실종 지적

출연연·대학 등 연구 현장 규제·간섭 타파 노력도 부족

정부의 R&D 예산 증가율 추이. /출처=과기정통부




고광본 선임기자


“대선 때 윤석열 대통령이 ‘과학기술 중심 국정 운영’을 표방해 기대가 컸는데 요즘 연구 현장에서는 실망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과학기술협회장)

“국가 연구소들은 예산을 받아도 투자 우선순위도 정할 수 없죠. 자율성이 없어요. 기획재정부가 너무 타이트하게 관리합니다.” (정부출연연구기관 원장)

“지방교육재정교부금 제도로 초중고에는 예산 지원이 많아 불용금도 많은데 정작 연구개발(R&D)을 하는 대학은 예산이 부족합니다.” (대학 총장)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2개월 가까이 된 요즘 과학기술계에서 나오는 하소연과 호소다. 글로벌 기술 패권 전쟁과 잠재성장률 하락세에 대응하기 위한 새 정부의 과학기술 육성 비전과 전략·로드맵이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우선 내년도 과학기술 예산 증가율은 1%대에 그쳐 높은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뒷걸음질 쳤다는 지적을 받는다. 게다가 국가전략기술 육성도 반도체와 원자력발전 등에 초점을 맞추는 바람에 다른 전략기술 분야는 기술 개발과 인력 양성 측면에서 자칫 소외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내년 과기 R&D 예산, 물가 감안하면 뒷걸음질

정부의 과학기술 R&D 예산 증가율이 최근 몇 년 새 두 자릿수를 기록하다가 내년에는 큰 폭으로 줄어 과학기술계의 염려가 커지고 있다. 최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학기술혁신본부가 기재부에 제출한 내년 과학기술 R&D 예산은 24조 6601억 원으로 올해(24조 2363억 원)보다 불과 1.7% 늘었다. 이 예산은 과학기술자문회의가 심의하는 ‘주요 R&D’로 전체 R&D 예산의 약 80%를 차지한다. 올해 정부 부처가 대학과 출연연·기업 등에 지원하는 R&D 예산은 29조 7000억 원이다. 4년 전인 2018년(19조 7000억 원)에 비하면 절반가량 늘었다.

과학기술 R&D 예산 증가율은 2016년부터 2018년까지 1%대에 그치다가 문재인 정부 들어 급증해 2019년 4.4%를 기점으로 2020년 18.0%, 2021년 13.1%, 2022년 8.8%를 기록했다. 2019년 7월 일본의 반도체·디스플레이 분야 소재·부품·장비 수출규제, 2020년 초 코로나19 사태로 관련 R&D 예산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연구자가 직접 R&D 과제를 기획해 제안하는 ‘연구자 주도 기초연구’ 예산이 문재인 정부에서 1조 2599억 원에서 2조 5000억 원까지 2배나 늘어난 것도 R&D 예산 증가 요인으로 꼽힌다.

하지만 내년에는 R&D 예산 증가율이 2018년 이후 5년 만에 다시 1%대로 급감하게 됐다. ‘연구자 주도 기초연구’가 중심인 창의·도전적 기초연구 예산(2조 5800억 원)이 1.1% 증가하는 데 그쳤다. 지역 R&D 지원 예산은 9600억 원으로 오히려 6.5%나 감소했다. 다만 반도체·배터리·양자·우주 등 10대 국가전략기술 분야의 R&D 예산은 3조 4800억 원으로 10.1% 늘었고 과학기술 인재 양성 예산(5672억 원)도 4.7% 증가했다. 주영창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은 내년 R&D 예산과 관련해 “각 부처에 지출 구조 조정을 유도해 약 1조 3000억 원을 절감했다”며 “유사·중복 사업 정비 등을 통해 약 1조 원을 절감해 주요 정책 분야와 신규 사업에 재투자했다”고 밝혔다. 과학기술 R&D 예산안은 6월 말 기재부로 넘어간 데 이어 인문·사회 R&D 사업 등과 함께 9월 중 국회에 최종안이 제출된다.

◇산학연, “예산 부족에 간섭 심해” 볼멘소리



정부출연연구기관은 필요한 R&D 예산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거나 정부의 간섭과 규제가 심해 아우성이다. 특히 추경호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이 최근 “공공기관 혁신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고 강조하면서 내년 출연연 예산 증가율이 겨우 2% 선에 그치고 인력 충원에도 제동이 걸렸다. 익명을 원한 한 출연연 원장은 “출연연은 국가전략기술의 최전선에서 역할을 해야 해 인력과 예산 증액이 필요하나 부족하다”며 “예산을 받아도 자체적으로 투자 우선순위도 정할 수 없다”고 호소했다. 이런 점을 공공기관 관리를 맡고 있는 기재부에 어필하고 있으나 여의치 않다는 것이다. 또 다른 출연연 원장은 “주 52시간제나 블라인드 채용 등 경직된 규제가 출연연의 발목을 잡고 있다”며 “연구원들이 정부와 기업에서 연구 과제를 수주해 인건비를 충당하는 연구과제수주시스템(PBS)에 대한 혁신 움직임도 없다”고 전했다.

기초과학 분야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기초과학계의 한 인사는 “정부의 R&D 예산이 전체적으로 그리 늘지 않아 기초과학 분야에서도 어려움이 예상된다”며 “반도체나 원전 등도 중요하지만 기초과학 쪽에도 신경을 더 써달라고 읍소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정부가 당장은 글로벌 공급망 관리 현안으로 떠오른 반도체 등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중장기적 관점에서 기초과학 예산을 늘리고 효율적 집행이 가능하게 하면 좋겠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심지어 연구 현장에서는 윤석열 정부가 반도체와 원전만을 강조하는 바람에 다른 분야의 R&D 과제를 제안할 때 반도체를 끼워넣어야 과제를 수주할 수 있다는 자조 섞인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익명을 원한 출연연의 한 박사는 “뇌를 연구하는데 반도체와 연관시켜 연구 과제를 만들어 신청해야 한다는 게 조직의 분위기”라며 “다른 출연연에서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런 기현상에는 우리 국가 R&D의 고질적 문제로 거론되는 ‘R&D 포퓰리즘’에 편승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연구비를 수주하기 힘들다는 위기의식이 깔려 있다. 현재 25개 과학기술 출연연의 경우 PBS 비중이 평균적으로 절반 정도에 달해 고유의 국가 임무형 연구에 충실하기 힘들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학의 경우에도 지방교육재정교부금으로 초중고교에만 교육예산이 몰릴 뿐 대학 예산 지원이 부족한 데 대해 한목소리로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이남식 서울예술대 총장은 “85조 원가량의 교육예산 중 70%가량이 초중고교에 쓰인다”며 “초중고생 1인당 1000만 원이 넘게 지원되지만 대학생에게 지원되는 예산은 1인당 50만 원가량에 그친다”고 비교했다. 그는 이어 “학령인구 감소에도 내국세의 20.79%를 고정적으로 할당하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 제도로 초중고 예산은 계속 늘어나 지난 5년간 초중고 교부금 예산 중 31조 원이 불용 처리됐다”며 “반면 대학 등록금은 14년째 동결돼 대학들은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소·벤처기업들도 볼멘소리를 하고 있다. 친환경 기술 벤처인 A사는 정부의 R&D 과제에 응모해 지난 4월 중순 ‘추천 대상’이라고 통보를 받았으나 5월 중순 ‘한정된 예산으로 인해 기회를 드리지 못한다’는 통보를 다시 받았다. 이 회사의 이 모 대표는 “하지만 이후 구두로 ‘6월 1일 계약하겠다’는 연락을 받았으나 다시 ‘6월30일까지 기다려달라’고 하더니 말이 없다”며 “벤처기업으로서 R&D 과제에 적극 응모하고 있는데 추천 대상이 된 R&D 과제마저 집행이 보류돼 답답하다”고 하소연했다.

또 다른 벤처기업인 김 모 씨도 “그동안 벤처 진흥을 강조하며 벤처·스타트업에 R&D 과제가 많이 배정됐는데 지금은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전했다. 정부가 내년에 기업 R&D 지원 사업 예산으로 1조 5700억 원을 배정하며 올해보다 4.1% 늘렸으나 중소·벤처·스타트업이 체감하기까지는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된다.

◇尹정부, 자유·과학기술 중시 약속 실종 우려

윤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거듭 과학기술 중시 국정 운영을 약속하며 ‘과학기술 선도 국가’ 비전을 제시했다. 윤 대통령은 △디지털 기술과 빅데이터를 토대로 한 ‘디지털 플랫폼 정부’ △대통령 직속 민관 과학기술위원회 신설 △정치와 과학의 분리와 탈원전 탈피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연구 환경 조성 △미래 선도 연구 10년 이상 지원 △청년 과학인 도전과 기회의 장 마련 등을 약속했다. 윤 대통령은 5월 10일 취임식에서는 “번영과 풍요, 경제적 성장은 바로 자유의 확대”라며 ‘자유’를 강조한 뒤 양극화 등을 해결하기 위해 ‘빠른 성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어 “도약과 빠른 성장은 오로지 과학과 기술, 그리고 혁신에 의해서만 이뤄낼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이대로 가면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2030~2060년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저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인구절벽과 가파른 국가채무 증가도 큰 문제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과학기술 컨트롤타워를 제대로 만들지 않았다. 반도체와 원전만 강조하다 보니 바이오·인공지능(AI)·수소 등 다른 국가전략기술 분야의 소외감도 커지고 있다. 국가 R&D 생태계의 주요 축인 대학과 출연연에 대한 간섭과 규제를 해소할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다. 국가 R&D 현장에서 도전과 모험으로 대표되는 기업가 정신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조남준 싱가포르 난양공대 교수는 “미국 대학은 전면적인 자유를 기반으로 무섭게 혁신하고 있고 중국 대학은 정부의 엄청난 지원을 바탕으로 과학기술 파워를 키우고 있다”고 위기감을 피력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상황이라는 게 대학 총장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이우일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은 “주요 5개국(G5)으로 도약하려면 국가 R&D에서 추격형을 벗어나 선도형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며 “과학기술 컨트롤타워를 정립하고 미국 DARPA(미국 국방부 고등연구계획국)처럼 도전적인 연구를 장려하는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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