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된 공공기관 낙하산 인사의 거취를 둘러싼 여야 대립이 계속되는 가운데 최근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는 인사들이 잇따르고 있다. 정부 여당이 공공기관에 대한 고강도 혁신과 함께 전 정권 임명 인사들의 사퇴를 거듭 압박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공기관의 물갈이 인사가 본격화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26일 공공기관 경영정보공개시스템 알리오에 따르면 정의당 의원 출신의 추혜선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코바코) 상임감사가 21일 사임했다.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 등을 거쳐 20대 국회에서 정의당 원내수석부대표까지 지낸 추 전 의원은 지난해 7월 코바코 감사에 임명됐다. 추 감사의 임기는 내년 7월까지로 아직 1년이나 임기가 남은 상태였다. 앞서 유민영 코바코 비상임이사도 이달 7일 사임했다. 유 이사는 노무현 정부 청와대 춘추관장과 문재인 정부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등을 지낸 대표적인 진보 정권 인사다. 유 이사의 임기 역시 내년 2월까지로 아직 임기 만료까지는 7개월가량 남았다. 방송통신위원회 산하 공공기관인 코바코는 그동안 문재인 정권과 가까운 인사들이 기관장과 이사진을 장악했다는 비판이 줄곧 제기돼왔던 곳이다. 지난해 10월 임명된 이백만 코바코 사장도 노무현 정부에서 국정홍보처 차장과 청와대 홍보수석을 거친 인연으로 문재인 정부에서 주교황청 대사를 지낸 바 있다.
민주노총 건설노조 부위원장 출신의 이상원 건설근로자공제회 비상임이사도 13일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 이사는 전임자가 올해 말까지의 임기를 마치지 않고 먼저 그만두면서 잔여 임기를 채우기 위해 그 자리에 들어갔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대선 직후인 3월 15일에 임명되면서 국민의힘 등 여당을 중심으로 전형적인 알박기 인사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달 초에도 문재인 정부 초대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홍장표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과 청와대 일자리수석 출신의 황덕순 한국노동연구원장이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문재인 정부의 대표 경제정책인 ‘소득 주도 성장’을 설계한 홍 원장은 정권 교체 이후 자신의 거취를 둘러싼 현 정부 여당의 사퇴 압박이 거세지자 한덕수 국무총리와 정면충돌한 뒤 사표를 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이전 정부에서 임명됐던 공공기관 인사들의 자진 사퇴 행렬이 이어지면서 하반기 대대적인 물갈이 인사가 이뤄질 수 있을지 주목된다. 현재 370개 공공기관 가운데 연내 기관장 교체가 예정된 곳은 71개에 달한다. 공공기관 5곳 중 1곳꼴로 기관장이 바뀌는 셈이다. 국민연금공단과 수출입은행 등 이미 기관장이 물러나 공석이거나 한국수력원자력과 한국가스공사처럼 임기가 만료됐지만 후임이 임명되지 않아 현 기관장이 계속 업무를 수행하는 곳, 연내 기관장 임기가 끝나는 곳 등이 대상이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가 ‘공공기관의 파티는 끝났다’며 고강도 혁신을 추진하고 있는 만큼 기관장 교체 폭은 예상보다 커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기획재정부는 최근 에너지 공기업 12곳을 포함한 총 14곳을 ‘재무위험기관’으로 선정하고 재정 건전화 계획을 밝혔다. 이 과정에서 재무 성과가 좋지 않거나 경영 관리상 문제가 발견된 기관의 경우 부담을 느낀 기관장이 임기 만료 전에 스스로 물러날 가능성도 있다. 기관장 교체와 맞물려 이사회를 구성하는 감사와 이사진의 교체도 뒤따를 여지가 있다.
여당은 연일 이전 정부에서 임명된 공공기관장들의 사퇴를 촉구하는 압박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권성동 국민의힘 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는 4일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된 인사들을 향해 “고위 공직자로서 자신의 철학과 정책 기조가 다른 대통령과 일한다는 발상 자체를 거두는 게 맞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이어 21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도 “실패한 정부의 실패한 관료는 민생 회복에 방해가 될 뿐”이라면서 “사퇴해서 마지막 자존심이라도 지키기를 바란다”며 사퇴를 거듭 압박했다. 여당은 정해구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과 정연주 방송통신심의위원장,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 전현희 국민권익위원장 등을 대표적 알박기 인사로 규정하고 자진 사퇴 공세를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버티기를 고집할 경우 현실적으로 사퇴를 강제하기는 쉽지 않다. 문재인 정부 초대 김은경 환경부 장관은 박근혜 정부가 임명한 산하 기관장들에게 사퇴 압력을 가한 혐의로 구속돼 대법원에서 최종 유죄판결을 받았다.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역시 이전 정권에서 임명된 산하 기관장들에게 사표 제출을 강요했다는 ‘블랙리스트’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공공기관장들에게 사표를 종용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조성됐다는 의미다.
이러한 이유로 정치권에서는 공공기관장과 대통령 임기가 일치하도록 제도를 개선하자는 주장이 점차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정우택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달 기관장 임기와 연임 기간을 각각 2년 6개월로 바꾸고 대통령 임기가 끝날 때 기관장도 물러나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김두관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이달 25일 공공기관장과 임원 임기를 2년으로 하고 연임 기간을 1년으로 제한해 대통령 임기와 일치하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우상호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도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대통령의 철학과 노선을 잘 실천할 수 있는 사람으로 정부 기관을 짜는 것이 맞는데 자꾸 임기가 일치하지 않으면서 거취 논란이 반복되고 있다”며 “특별법을 제정해서라도 임기제 공무원의 임기와 대통령의 임기를 일치시키는 제도 개선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정권 교체기마다 알박기 인사 논란을 둘러싼 신구 권력 간 충돌이 반복되고 있는 만큼 여야 합의를 통해 제도 개선에 나설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다만 민주당은 ‘산업부 블랙리스트 사건’과 관련된 고소·고발 사건이 모두 정리돼야 한다는 입장이어서 야당이 이를 수용할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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