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업황 악화에 따른 무역적자 누적으로 한국경제가 침체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 무역적자폭 확대에 따른 원화 가치 하락은 에너지나 곡물 등 주요 수입품 가격 상승으로 이어져 국내 물가 상승을 부추긴다. 정부는 기준금리를추가 인상과 긴축재정 등으로 물가 인상을 억제하겠다는 방침이지만, 이 같은 조치가 자칫 경기 불황을 심화시킬 수 있어 ‘스태그플레이션(불황 속 물가상승)‘ 진입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반도체 수출 제자리.. D램 가격하락에 실적 악화 불가피
11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한국 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하는 반도체 수출액이 몇달 째 제자리걸음 중이다. 지난달 반도체 수출액은 112억1000만 달러로 올 6월(123억5000만 달러)은 물론 5월(115억4000만달러)과 비교해도 줄었다. 지난달 반도체 수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2.1% 늘어나는 데 그쳐 ‘반도체 코리아’가 휘청이고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반도체 수출액이 몇달 째 횡보하는 이유는 글로벌 수요 감소 때문이다. 마이크로소프트나 구글 같은 데이터센터 운영 업체들은 이미 쌓아놓은 D램 재고와 경기불황 우려 등으로 반도체 구입을 꺼리고 있다. 이에 따라 글로벌 D램 가격의 지표 중 하나인 PC용 D램(DDR4 8Gb) 고정거래가격은 지난해 7월 4.10달러에서 지난달 2.88달러로 1년새 30% 하락했다. 여기에 차세대 D램인 DDR5를 지원하는 인텔의 서버용 중앙처리장치(CPU)인 ‘사파이어래피즈’ 출시가 늦어지며 메모리 교체 수요도 같이 줄어 D램 가격 하락 추이를 부추기고 있다.
한국 전체 수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20% 수준이지만 경제 효과는 그 이상이다. 글로벌 D램 및 낸드플래시 시장 2위 업체인 SK하이닉스의 지난해 영업이익률은 34%에 달할만큼 부가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국내 제조업 평균 영업이익률은 7% 수준에 불과하다.
시스템 반도체 부문도 제 몫을 하기까지 상당 시일이 걸릴 전망이다. 삼성전자가 최근 주력하고 있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부문에서는 대만 TSMC가 애플이나 미디어텍 등 주요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 업체 물량을 싹쓸이하고 있어 확실한 수익원 역할을 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중국 SMIC가 최근 7나노 공정 제품 양산에 성공한 것으로 전해지는 등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도 속도가 붙고 있어 중국 수출 비중이 줄어들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부문도 전망이 암울하다. 삼성전자는 올해 출시한 플래그십 스마트폰인 ‘갤럭시S22’ 국내향 모델에 자신들이 설계한 ‘엑시노스2200’가 아닌 퀄컴의 스냅드래곤을 탑재했다. 업계에서는 삼성이 국내향 모델에 엑시노스를 탑재 못한 이유로 수율 문제를 들고 있다. 이외에도 엑시노스 시리즈는 발열과 그래픽처리장치(GPU) 등에서 일부 문제를 노출하며 애플이 설계하는 바이오닉 시리즈와의 기술력 격차도 벌어지고 있다.
반도체 수출이 주춤하며 올해 무역적자액이 1996년의 기록한 역대 최대 무역적자액(206억 2000만 달러)을 넘어설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는 고환율에 따른 수출 증대로 ‘V자’ 경기반등에 성공했지만, 이번 글로벌 경제위기는 한국이 원자재가격 폭등과 같은 ‘공급부문’이 촉발했다는 점에서 활로가 잘 보이지 않는다. 김태기 단국대 명예교수는 “반도체 외에도 이차전지, 에너지, 방산 부문에 집중해서 한국경제의 활로를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몇년간 승승장구했지만.. 업황 하락에 고개숙인 반도체
‘25개월 연속 플러스, 15개월 연속 100억 달러 달성, 역대 7월 중 1위 달성’
산업부는 지난달 수출입 동향을 발표하며 반도체 수출실적에 대해 이 같이 강조했다. 정부 표현만 보면 ‘반도체 코리아’의 위상은 갈수록 굳건해지는 듯하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7월 반도체 수출액의 전년대비 증가율은 2.1%로 사실상 제자리 걸음을 했다. 올들어 반도체 수출액 증가율을 살펴보면 3월 37.9%에서 4월 16.0%로 반토막 난뒤 5월(14.9%)과 6월(10.7%)에도 증가율 감소추세가 이어지고 있다. 올 하반기에는 반도체 수출액이 역성장을 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다. 지난달 반도체 수출액 또한 112억달러를 기록하는 데 그쳐 5월(115억 달러)과 6월(123억달러) 에 비해 줄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올해 보다는 내년과 내후년에 반도체 업황이 더욱 나빠질 것이라 우려 중이다. 시장조사기관 가트너는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공급과잉 영향으로 관련 시장 성장률이 3.6%에 그칠 것이라 내다봤으며, 2024년에는 아예 -2.2%의 역성장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무엇보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등 3사가 과점 체제를 형성 중인 D램 시장과 달리 대여섯개 업체가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매출 감소세가 두드러질 전망이다. 낸드플래시 시장에서는 중국의 YMTC(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가 최근 232단 제품 개발에 성공한 것으로 전해지는 등 중국의 ‘반도체 자급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 한국 반도체 기업에 상당한 타격을 안겨줄 것으로 우려된다.
반도체 업황 악화는 한국 수출 성장률 정체로 이어진다. 한국역협회는 올 하반기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이 3547억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3.9% 증가하는데 그칠 것이라는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다. 올 상반기 수출액 증가율(15.6%)과 비교하면 하반기 수출 전선에 말그대로 ‘먹구름’이 끼인 상황이다.
반도체 수출액은 1994년 사상 첫 100억달러를 넘어선 후 2010년 500억 달러를 돌파했으며 지난해에는 1287억 달러로 역대 최고 기록을 경신하기도 했다. 올 상반기 반도체 누적 수출액이 690억달러라는 점에서 역대 상반기 기준 1위를 기록했지만, 반도체 시황 악화로 지난해 기록을 넘어설 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하락 싸이클에 접어들면서 국내 반도체 기업의 이익 및 수출 하락 등이 우려된다”며 “글로벌 반도체 수요를 견인해 줄 자율주행차 등 신기술 상용화 또한 각국의 공급망 재편에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듯 보여 단기간에 업황 반등이 쉽지 않아 보인다”고 밝혔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