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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펀더멘탈 흔들면 죽는다”…영국이 전 세계 정책 당국에 준 교훈 [조지원의 BOK리포트]

금융시장 예민한데 설익은 정책은 오히려 독

英 '재원 조달 계획 없는 도박'에 시장 출렁

英 순채무국에 쌍둥이 적자…경기마저 위축

제조업 없어 낙수효과 어렵고 타이밍도 나빠

"경제 펀더멘탈 중요성 깨닫게 해준 사례"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오른쪽)와 쿼지 콰텡 영국 재무부 장관이 지난 2일(현지시간) 집권 보수당 연례 총회가 열린 버밍엄에서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영국이 반세기 만에 최대 규모의 감세안을 내놓았다가 호되게 당하면서 뜻하지 않게 전 세계 정부와 중앙은행에 큰 교훈을 안겼다. 글로벌 인플레이션과 함께 미국 연방준비제도(Feb·연준)가 무서운 속도를 금리를 올리면서 금융시장이 예민해진 요즘 같은 시기에 설익은 정책을 내놓았다간 거센 역풍에 부딪힌다는 것이다.

최근 글로벌 시장은 한때 기축통화였던 파운드화조차 펀더멘탈이 흔들리자 자칫 휴짓조각이 될 수도 있다는 공포에 휩싸일 만큼 분위기가 좋지 않다. 전 세계 재정·통화 당국자들은 당분간 국가 신인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안은 신중히 접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우리나라 역시 무역적자로 인한 경상수지 적자 가능성에 단기외채 증가, 원화 가치 급락, 외국인 자금 유출, 외환보유액 감소 등으로 인한 펀더멘탈 위기에 집중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미국 달러와 유로화에 대한 파운드화의 교환 비율을 알리는 영국 런던 시내 환전 안내판을 촬영한 사진. 연합뉴스


경선서 예고한 대로 대규모 감세안 발표했지만

영국발(發) 글로벌 금융 불안이 확산한 것은 지난달 23일이다. 리즈 트러스 신임 영국 총리가 취임 한 달 동안 준비한 ‘2022년 성장 계획(Growth Plan 2022)’이 발표되자마자 시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는 가계·기업에 대한 에너지 부담 경감, 감세 등을 통해 성장을 촉진하겠다는 재정 부양책이었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① 2022년 10월부터 2023년 3월까지 가계 310억 파운드, 기업 290억 파운드 등 600억 파운드 규모로 에너지 부담을 경감 ② 기본세율 20%→19%로 1%포인트 감면하고 소득 상위 1%에 적용하는 최고세율 45%→40%로 경감과 함께 법인세 인상 중단 등 향후 5년간 매년 최대 450억 파운드 규모의 감세 ③ 규제 완화 등 공급개혁으로 영국 잠재성장률 2.5%로 상향 ④ 감세 등으로 인한 세수 부족분을 위해 국채 추가 발행, 2022년 회계연도 국채발행 계획은 1939억 파운드로 620억 파운드 증액(GDP 대비 8.4%로 2.7%P 상승) 등이 주요 내용이다. 특히 감세는 1972년 이후 50년 만에 가장 큰 규모로 발표됐다.

트러스 총리의 대규모 감세 정책은 사실상 예고된 상태였다. 트러스 총리는 최종 경선에서 경쟁자였던 리시 수낵 전 재무장관보다 광범위한 감세안을 내놓고도 당선됐다. 취임 이후로도 감세 위주 재정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영국 정부는 이번 감세안을 발표하면서 민간투자 증가, 노동생산성 향상 등으로 영국이 다시 매력적인 투자처가 될 수 있다는 기대도 숨기지 않았다.

영국 보수당에 항의하는 사람들 [EPA=연합뉴스]


재정 건전성 우려 증폭에 시장은 발작

그러나 이와 같은 바람은 시장에서 전혀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부가 기대했던 효과는 나타나지 않고 순차입과 정부 지출 등이 증가하면서 재정수지 적자 폭만 커질 수 있다는 우려만 커졌다. 불안감에 재정 부양책이 발표되자마자 영국 국채금리가 단기 2년물 기준으로 연 4.44%까지 급등하고 파운드화 가치는 달러당 1.07파운드까지 떨어지는 등 시장 발작이 나타났다. 파운드화 가치 폭락은 이미 강세였던 달러를 더욱 강하게 만들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을 단숨에 위기로 내몰았다.

주요 투자은행은 트러스 총리의 재정 지원 규모가 예상보다 컸을 뿐만 아니라 성장률 제고 효과가 크지 않다는 평가를 내렸다. 특히 대규모 감세 정책을 발표하면서도 구체적인 재원 확보 방안을 언급하지 않아 시장 불안을 키웠다. 더군다나 소득세 최고세율구간 폐지는 시장에서도 예상치 못했던 정책이었다. 통상 예산안과 함께 발표되는 예산책임청(OBR)의 중기 재정전망 자료도 발표되지 않아 사전 평가를 회피했다는 비판마저 나왔다. 씨티(Citi)는 “재원조달 계획이 없는 도박(unfunded gamble)이며 부채비율은 2026년까지 110%까지 상승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채권시장 관계자는 “어떤 정부든지 세금을 깎으면 경제가 성장해 세수가 늘기 때문에 국채 발행 부담 없다고 강조하기 바쁘다”라며 “그런데 재무장관이 나와 감세를 추진하면서 국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겠다고 말하는 건 굉장히 뻔뻔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지난달 26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의 한 환전소 앞으로 행인들이 지나가고 있다. 영국 파운드화 가치는 이날 한때 달러당 1.0349파운드까지 떨어졌다. 1971년 이후 최저치다. 연합뉴스


만성적인 경상 적자인데 최근 경기마저 둔화

영국발 금융 불안이 발생한 근본적인 원인은 재정 신뢰도가 낮은 상태에서 무리한 정책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영국은 최근 경기 상황이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펀더멘탈도 조금씩 흔들리는 상황이다. 펀더멘탈이 취약한 상태에서 성장률을 높이면 해결될 문제라고 안이하게 접근해 화를 키웠다는 평가다.



올해 2분기 영국의 GDP 성장률은 -0.1%로 올해 1분기(0.8%)보다 0.9%포인트 낮아졌다. 제조업 생산이 줄어드는 가운데 생계비 부담이 늘면서 민간소비마저 위축된 상황이다.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7월 10.1%로 1982년 2월(10.2%) 이후 4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이에 실질임금은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하는 등 전반적인 침체 우려가 커지면서 취약한 상태였다.

하이투자증권에 따르면 영국 정부 부채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GDP 대비 130.9%로 코로나19 직전인 2019년 말(108.8%) 이후 2년 동안 22.1%포인트나 급증했다. 심지어 영국은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 국가로 2021년 기준 GDP 대비 쌍둥이(재정·경상수지) 적자 규모는 -10.6%로 재정 리스크가 큰 이탈리아(-3.9%)보다 심각한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영국의 GDP 대비 경상수지 비율이 2020년 -2.5%, 2021년 -2.6%에서 올해 -7.2%로 크게 나빠질 것으로 내다봤는데 내년 전망치도 -7.6%로 점차 악화될 것으로 예상했다.

여기다 영국의 외환보유액은 1080억 달러로 경제 규모에 비해 충분치 않다는 평가도 받는다. 1992년 9월 16일 발생했던 ‘검은 수요일’로도 불리는 ‘유럽환율매커니즘(ERM)’ 사태에 대한 트라우마로 외환 당국이 외환개입에 나설 여지도 크지 않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당시 영국은 조지 소로스를 비롯한 헤지펀드 투자자들이 파운드화를 투매하자마자 ERM을 탈퇴하면서 33억 파운드의 손해를 입었다. 영국이 미 연준과 상설 통화스와프를 체결한 상태인 데다 파운드화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6대 기축통화 중 하나라는 점 역시 이번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영국 파운드화와 미국 달러화 지폐. 연합뉴스


GDP 80%가 서비스업…제조업 기반도 부족

영국은 낙수효과를 기대하기엔 제조업 기반 역시 탄탄치 못하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가 영국 통계청 자료를 분석한 결과 2017년 기준으로 영국 GDP에서 서비스 분야가 차지하는 비중은 79%이고 생산 분야가 14%, 건설 6%, 농업 1% 등으로 집계됐다. 주로 금융·경영·소매·관광 등 서비스업이 지탱하는 산업 구조다. 제조업 기반이 없어 트러스 내각이 이번 감세안으로 기대했던 낙수효과가 발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제학자는 "제조업은 물건을 빨리 만들어내면 되기 때문에 생산성을 단기간에 높일 수 있다"라며 "그런데 서비스업은 생산성이 갑자기 2~3배 높아지면서 성장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영국은 낙수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美 연준 긴축 고삐 당기는데 최악의 타이밍

무엇보다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미 연준이 올해만 정책금리를 0.00~0.25%에서 3.00~3.25%까지 3%포인트 올리는 동안 전 세계 중앙은행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긴축에 속도를 내는 상황이다. 심지어 9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연내 1.25%포인트를 더 올리겠다고 발표해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화지수(DXY)가 20년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하는 등 글로벌 금융·외환시장 변동성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에 감세안을 발표한 것이다.

더구나 영국 중앙은행이 9월 22일 통화정책회의에서 정책금리를 1.75%에서 2.25%로 50bp 인상한 직후였다. 덕분에 영란은행은 금리를 올려놓고 시장안정을 위해 긴급 국채매입을 발표하는 엇박자 행보를 밟을 수밖에 없었다. 영국은 대외부채가 더 많은 순채무국으로 자국 통화 가치가 떨어지면 채무 상환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약점도 있다.

지난달 29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 화면에 코스피, 코스닥과 원·달러 환율이 표시돼 있다. 연합뉴스


FT “英 잘못된 실험, 잠재적 실패 위험 공유”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자 쿼지 콰뎅 영국 재무장관은 감세 정책 가운데 고소득자에 적용되는 최고세율 인하안을 추진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일부 정책을 철회하면서 글로벌 시장은 안정을 되찾았지만 재정정책에 대한 불확실성이 여전한 만큼 당분간 금융 불안이 지속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 이번 사태로 크게 떨어진 영국 정부의 신뢰도 역시 회복하려면 상당 시간이 필요하다. 무디스나 S&P 등 글로벌 신용평가사의 발표에 시장이 추가적인 영향을 받을 가능성도 남아 있다.

이번 영국 사태를 지켜본 전 세계 각국에도 경각심을 안겨줬다. 인플레이션 대응과 경기침체 방어 딜레마가 나타나는 상황에서 한순간의 선택이 경제위기로 이어질 수 있음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셈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글로벌 국채시장의 높은 변동성은 일차적으로 영국 정부의 잘못된 정책실험에서 비롯되었지만, 미국이나 여타 국가들도 고물가와 저성장 사이에서 최적의 정책조합을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잠재적 정책 실패 위험을 공유했다”고 진단했다.

정부 관계자는 “지금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경상수지를 중심으로 한 경제 펀더멘탈”이라며 “정부가 경제 펀더멘탈을 생각하지 않으면 얼마나 위험한 지를 영국이 몸소 보여 준 셈”이라고 말했다.

※ ‘조지원의 BOK리포트’는 국내외 경제 흐름을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도록 한국은행을 중심으로 경제학계 전반의 소식을 전하는 연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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