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인터넷 매체가 이태원 참사 희생자 158명 중 155명의 명단을 유족 동의 없이 공개해 파문이 일고 있는 가운데, 의사 출신 보건학자인 김승섭(43) 서울대 보건대학원 환경보건학과 교수가 명단 공개를 멈춰달라고 호소했다.
김 교수는 1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태원 참사 이후로 언론사 기자분들께서 연락을 주셨다"며 "제가 세월호 참사와 천안함 사건의 생존자 트라우마를 연구했던 사람이라는 이유로 인터뷰를 요청하셨지만, 응하지 못했다”고 운을 뗐다. 이어 김 교수는 “그날 밤 이태원을 생각하는 일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어떤 포스팅도, 기고글도 쓰지 못했던 것도 같은 이유”라고 적었다.
김 교수는 "유가족으로부터 동의를 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피해자들의 이름을 공개하겠다는 언론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멈춰주셨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그는 “이태원 참사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에게는 그날의 기억이 어쩔 수 없이 거대한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평생 그 기억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며 “트라우마를 경험한 이들이 그 이후 시간을 견디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정이다. 트라우마는 전쟁이든 교통사고든 성폭행 사건이든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거대한 충격을 받는 일이고, 그 상황을 경험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부터는 당신이 통제할 수 없는, 원하지 않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안정이다”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참사를 두고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가장 크게 상처받은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라며 “지금 상황에서 그 이름 공개로 유가족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저는 모르겠다. 만약 그 공개가 사회 정의를 실천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그 정의가 누구의 자리에서 바라본 정의인지 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한다”고 했다.
한편 이날 유튜브 채널 ‘더 탐사’와 최근 출범한 매체 ‘민들레’는 이태원 참사 희생자 명단 전체를 공개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민들레는 “시민언론 더탐사와의 협업으로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 명단을 공개한다”며 “희생자들을 익명의 그늘 속에 계속 묻히게 함으로써 파장을 축소하려 하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재난의 정치화이자 정치공학”이라고 주장했다.
민들레와 더 탐사는 유족의 동의를 얻지 않은 채로 희생자들의 명단을 공개했다. 이들은 “유가족 협의체가 구성되지 않아 이름만 공개하는 것이라도 유족들께 동의를 구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깊이 양해를 구한다”며 “희생자들의 영정과 사연, 기타 심경을 전하고 싶은 유족들은 이메일로 연락을 주시면 최대한 반영하겠다”고 전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